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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talked

박노자 <붓다를 죽인 부처>

by AKHWEE 2012. 6. 12.

개인적으로 박노자와 박노자의 글을 정말 좋아한다.(책 몇권, 사설 몇편 읽어본 정도지만;;;) 이념성을 떠나 이정도로 한국사회에 대해 애정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 누가있을까?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초기 불교에 대한 '해방적 해석'의 시도다. 우리 불교가 국가 또는 지배계급과 유착한 역사가 이미 2000년을 훌쩍 넘은 만큼 우리 의식 속에 남아 있는 불교는 현실을 따라가며 인정하는 식이거나 지극히 개인 중심적이고 보수적이다. 개인의 문제들을 모조리 개인의 악업으로 설명하는 등 탈사회화`개별화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개인적 차원의 '업장 소멸'에 그친다. 이렇다보니 불교 하면 절에 들어가 불공을 드리고 복을 비는 모습부터 떠올리기 마련이다. 이처럼 현실 순응적이고 개인 중심적인 불교에서는 작복, 즉 선업 쌓기도 결국 개인적 수행이나 신앙 행위라는 차원에서 이해된다.

 게다가 불교의 대사회적 측면 역시 현실을 무조건 긍정하고 재확인하는 '국가 수호', 즉 소위 '호국'에 국한되고 만다. 그들에게는 '대입 기도'로 고생하는 학부모들도, 서울 삼각산 도선사 명부전에 걸려 있는 고 박정희`육영수 부부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초상화도 별문제 되지 않는다. 입시 경쟁은 개인의 신앙 행위(기도)를 통해서 해결되는 문제고, 권력이나 재력을 장악한 사람은 "선업을 잘 쌓아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긍정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서 미군의 폭격을 받아 처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간 아이들을 생각해보자. 그 죄 없는 아이들이 당한 고통을 두고 스스로 지은 '악업;의 결과일 뿐이라 말하며 은근히 워싱턴의 살인마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혹은 입시 경쟁이라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대한민국의 아들딸들을 "악업을 지은 결과"라 외면하면서, 고액 과외를 받아 '무사 통과'힌 강남 자녀에게는 "선업을 잘 쌓은 결과"라며 박수를 보내야 하는가?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살인마들의 살육도, 소수 부유층 사이의 명문대 간판 대물림도 영구화되고, 이름 모를 무수한 타인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끊임없이 안겨줄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일체중생의 이고득락(고통을 없애고 즐거움을 얻음)인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낳은 고통을 영구화한다는 것은 불교의 근원적 목표와 상반된다. 고통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고통을 이해한다면 이는 '나;와 우리 모두의 해탈을 궁극적으로 방해할 뿐이다.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고, 반대로 어쩌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행동에 동참하며 우리는 욕심에서 멀어지는 법을 배우고, '남'을 나 자신보다 앞에 두며 나보다 타인을 더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바로 여기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선이 지워지고, 우리 '자아'가 궁극적으로 망상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자아도 타자도 궁극에 가서는 없으며 나만의 행복도 나만의 해탈도 무의미해진다. 하화중생(중생을 교화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어떤 깨달음도 이기적인 정신의 유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중생의 모든 고통이 나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불교의 영혼은 도망가고 없다.

 '해방 불교;에는 사찰도 불상도 기도도 필요 없거나 이차적이다. 해방 불교는 부처님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되는 것이다. 고통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에 임하고, 고통의 원인을 파해치며 모든 중생과 함께 고통을 치유한다. 고통의 원인을 식별하고 치유하는 방법은 우리가 현대를 사는 한 오늘날의 사회과학에 의존하지 않을 순 없다. 그러나 이 작업의 근저에 흐르는 정신은 지난 2500년 동안 바뀐 게 없다. 자아의 경계선을 넘는 자비의 정신은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다.


개체의 욕망이라면 얼마든지 과욕 또는 탐욕일 수 있지만, 전체의 탐욕이라면 곧바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할 '사회적 통념'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인간에 대한 관대한 냉소'라 하겠다.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악에 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도, "그건 인간 본성의 문제 아니냐"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전쟁에 대해서도 '인간의 공격적인 본능'을 들먹이며 당연한 일이라 여기고, 월드컵이 상징하는 상업화된 대형 스포츠에 대해서도 "인간의 본능적인 공격성을 축제로 돌린다"며 옹호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성매매와 같은 '경제력에 의한 강간'까지도 "남성의 성욕을 분출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느냐"먀 되묻기도 한다.

 물론 양성평등의 논리가 어느 정도 기반을 확보한 오늘날 '남자의 배꼽 밑 일을 어떻게 단죄할 수 있느냐'는 식의 주장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반면 전쟁이나 스포츠에 대해서는 아직도 '좋든 싫든 인간으로서 당연히 하는 일'이라는 통념이 강해 보인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전쟁할 수 있는 '합법적 권리'를 가진 국가가 세금을 요구하면 그대로 갖다 바치고, 살인 훈련(군 복무)에도 순순히 응하며, 월드컵과 같은 국가간 경기가 시작되기만 하면 텔레비전 화면에 달라붙는 '나'자신을 관대하게 봐주려는 심리인가? 아니면, 폭발력이 큰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는 물론 생각조차 회피하려는 '안일함의 지향'때문인가? 유교에 대한 기억, 즉 인간의 본성을 분명히 선한 것으로 보고 전쟁이나 경쟁을 적어도 당위적 차원에서 죄악시했던 가르침이 이미 까마득해진 덕분인가? 사람들은 친일파 이야기만 나오면 당장 도덕군자가 되어 변절을 준엄하게 꾸짖지만 인간 본성론을 펴기만하면 순자 그 이상으로 냉소적으로 변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대나 중세의 '신통력'신앙은 국가와 지배계급에 의해서 부단히 이용당해온 것이었고, 현재의 '도력','기도발' 이야기는 종교의 자본화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국가에 의한 악용이나 중교의 자본화 또한 한국에 있는 다른 종교들이 똑같이 겪는 문제이지만 불교가 특히 아쉽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신론인 불교의 본질상 '신통력'담론이 원칙적으로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본질로 따지자면 내 아들이 서울대 입학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내 아들, 네 아들 구분 없이 입시 지옥에 시달리는 모든 이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으로 물심양면 학벌 타파 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붓다가 살던 당시의 수행자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인식이나 사회적 욕구 등을 외면할 수 없었던 불교가 '신통'을 부차적인 요소 하나로 받아들였다 해도 2500년 후의 불자인 우리는 시대가 바뀜에 다라 이 비본질적인 부분을 과감히 수정해야 할 듯하다. 우리의 종교는 신과 기적, 기도의 종교가 아니고, 일체 중생들이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껴안고 보살펴 주면서 함께 살아가야 할 이성과 자비의 무신론적 종교다.


 그렇지만 깨달음을 목적으로 할 만한 여유도 없고, 사회의 기본적인 유리적 틀과 함께 불교에서 말하는 탐욕`성냄`어리석음의 늪을 벗어날 만한 방도를 구해야 하는 평범한 갑남을녀는 다르다. 그들로 하여금 불교의 기본인 '여러 가지 나쁜 일을 짓지 않고 좋은 일을 받들어 행하는'도리를 실천하도록 하려면 원효와 같은 고답적인 유리적 상대주의보다는 윤리에 대한 '자율적인 확신'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악업을 지으면 나중에 나쁜 곳에서 태어날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비롯된 윤리에 대한 '타율적인 확신'이 아니라 살인이나 비방과 같은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혐오에 기반을 둔 '나 자신'의 윤리적 확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에게 남을 죽이는 일은 극히 곤란한  일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상대방을 아무리 혐오한다 하더라도 죽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넘어, 자신을 살인자로 만들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은 심리학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 등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의 본모습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불살생계를 지키고자 입대를 거부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세계에서 정상적인 인간다운 생활을 하려는, 극히 자연스러운 행위다.

 문제는 비정상적인 계급 사회가 계율에 관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데에 있다. (...) 계급 사회는 우리의 자비스러운 마음을 파괴하고 잠식하기에, 계율을 내면화하여 어떤 외부적인 강제 없이도 따를 수 있는 자비로운 자율적 주체일 것을 전제하는 붓다 본래의 계율은 파괴되고 만다.


종교미술이란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초월적인 이상을 재현하며 우리 앞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권력관계를 배경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 현실적 권력관계를 신성화시키기도 한다. 그러기에 8세기 군주 경덕왕이 투자해서 만든 종교 미술품을 20세기의 군주 박정희가 다시 한번 '국위선양'을 위하여 썼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결국 종교미술품 하나가 대중들의 양심이라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종교심리와 직접 상통하는 측면과, 지배계급의 착취와 살인을 정당화시키고 나아가 신성화시키기까지 하는 '지배이념 주입'의 측면을 동시에 보유하는 것이다.


보는 이를 압도하며 붓다의 무한한 권위를 실감하게 하는 바미안 왕국의 '초대형 불사'야 말로 미술을 통한 붓다 신격화, 권력화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미 쿠샨 미술에서 보이기 시작한 붓다의 신격화 경향은 이 바미안 대불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것을 파괴하려 했던 탈레반 정권이야 야만을 저질렀지만, 우리가 굳이 '힘'을 상징하는 커다란 부처님의 모습 앞에서 자비의 가르침을 배울 필요가 있는가?


붓다의 가르침은 초자연적인 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교주의 권위를 확립시키는 '계시'의 성격도 갖지 않는다. 붓다는 누구나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진리를 설함으로써 그 진리의 자율적인 이해를 유도할 뿐 자신에게 어떤 초자연적, 신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붓다는 아무도 '구제'하지 못한다. 다만, 스스로 자신을 구제할 수 있게끔 신도에게 업과 연기의 실상을 파헤칠 만한 지혜를 얻도록 도와줄 뿐이다.


도법스님: 원광 스님 같은 경우는 국가 체제와 타협을 한 셈이죠. 부처님은 국가와 민족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를 법dharma에 뒀습니다. 법에 근거하고, 법에 맞는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지 않는 한 어떤 선택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없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구요. 원광 법사도 그런 부분에 대한 이해나 인식은 있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상황적으로 타협한 거죠.

 부처님과 비슷한 경우가 마하트마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입니다. 얼핏 보면 독립운동이라고 하는 것도 인도라고 하는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국가와 민족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간디는 국가와 민족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를 법과 진리에 두고 있습니다. 당시 소위 간디의 독립운동을 비폭력 저항운동이라고 얘기하잖아요. 비폭력, 비협조 저항운동을 통해서 인도 독립을 이끌어내겠다는 운동이었지요. 그렇게 진행을 했지만, 문제는 인도 민중 다수가 그런 사상과 정신, 그런 방법에 훈련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죠. 그래서 처음엔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대중운동을 전개했는데, 결국 영국에 대한 분노, 증오, 적개심으로 인도 민중의 감정이 폭발합니다. 살인, 방화, 파괴, 그야말로 통제 불능의 상황이 왔어요. 영국도 통제할 수 없고,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정치적 판단을 하는 사람들은 '이대로 밀고 나가면 독립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비폭력 정신은 박살이 난 거죠. 간디의 비폭력은 물리적 폭력만을 의미하지 않고, 심리적 폭력까지 포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간디가 '안 된다'고 제동을 겁니다. 간디의 논리는 그거죠. 진리의 실천론이 비폭력인데, 비폭력의 길을 통해서 독립을 이끌어 내야지, 그 길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독립을 끌어내는 것은 결코 인도를 위해서 희망적이지도 않고, 인류 문명사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자 네루가 "비록 당신이 그걸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막을 길이 없습니다"라고 하니까, 간디가 "그럼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며 단식을 하게 됩니다. 목숨을 건 단식을 하니 인도 민중의 분노에 찬 폭력 사태는 가랑ㄵ습니다. 그러면서 독립은 더 지연되죠.

 그러나 간디가 선택한 것은 진리의 정신, 진리의 길입니다. 국가와 민족의 가치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를 진리의 길에 두고, 국가 문제를 다뤘던 거죠. 저는 적어도 종교가 바로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초기 불교는, 모든 불완전하고 고통슬운 존재들은 연기의 법칙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계속 그 모습과 성질을 바꾸면서 살아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몸과 정신의 작용인 업이 생기고, 그 업의 결과들이 정신 속에서 식, 즉 자아와 세계에 대한 (주로 도착된) 의식이 되고....'나', '우리'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이처럼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탈바꿈해가고 있다면 늘 그대로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본래부터의 깨달음'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가? 원효의 논리는 고도의 변증법을 구사한 관념주의적 초거대담론임에 틀림없지만, 이 담론이 과연 불교의 근원적인 가르침과 얼마나 어울리는지 의심이 든다.


붓다는 예리한 현실 비판자였으며, 근본적으로 이 세계를 고에서 떠날 수는,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곳으로 인식했다. 자신과 남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는 것은, 붓다에게는 오직 폭력`착취`이윤추구에 대한 부정을 내포하는 일련의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붓다는 해탈의 가능성을 제시해온 낙관주의자였지만, '지금, 여기'의 현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일찍부터 들어온 대승불교가 현실을 이상화`미화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것이 붓다 본래의 가르침과는 다름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불교의 '제법무상'은 우주의 모든 구성 요소들이 쉴 새없이 달라지고 바뀌고 탈바꿈하는 만큼, 불변하며 고정된 대상물이란 우리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주체와 대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인연'에 따라 늘 유동적으로 바뀌면서도 고통을 면하기 어려운 속세에서는 누구의 이름으로도 자신과 남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어선 안 된다. '폭력'을 요구하는 국가나 단체, 운동이 있다면 결국 언젠가는 그들의 이념이 허구였음이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으로 세상에 새로운 고통을 추가하는 행위는 '나쁜 원인'이 되어 폭력 행위자를 비롯해 모두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수탈기구로부터의 민중 방어라는, 특정 상황에서 진보 운동가들이 피하기 어려운 '민중 방어적 폭력'이라 하더라도 불가피한 차악일망정 선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방어적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이더라도 그 폭력의 나쁜 결과를 인식하고 이를 중지시켜 비폭력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길을 열심히 찾아야 할 것이다.

 '민중 방어적 폭력'도 나쁜 원인을 파하기 위해 출구를 급히 구해야 하는 '길이 막힌 골목'이지만, 자본이 부추기는 경쟁이나 국가가 유지하고 훈련시키는 군대와 같은 억압적인 상설 폭력 기구들은 '나쁜 원인'이외에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국가(특히 군대 당국)와 자본 등 사회적 고통을 제공하는 자들과의 유착에서 벗안 ㄹ수 없는 불교는 죽은 불교다.

 그리고 "어머니가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는 붓다의 말씀을 실천할 아무런 능력도, 의지도 없는 불교 역시 죽은 불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