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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s/from czezh, turkey

2010.12.25(토)

by AKHWEE 2011. 3. 15.






















아침에 일어나보니 얕게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밤새 내리던 비가 눈이 되었나 봅니다. 덕분에 날씨는 맑아 프라하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멀리 현대식 건물들과 라디오 방송탑까지 보일 정도로 맑았습니다. 
하지만 눈이 오는 관계로 전망대에 오르는 것은 또 다음으로 미루었습니다.
오늘은 프라하에서 가장 규모가 큰 버스 터미널인 플로런스 터미널에 들려서 체스키 크룸로프로 가는 티켓을 산 후, 중앙역(기차)에 가서 쿠트나 호라라는 지방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매일 그렇듯이 지도없이 무작정 걷기 때문에 계속 길을 물어보며 다녀야 했습니다. 
중앙역은 이름 그대로 프라하와 관련된 모든 철도가 집합하는 중앙이었습니다. 국내,국외선 기차와 쇼핑센터, 식당도 많이 모여있었습니다. 추위를 피하려 어느 비둘기들은 역 안까지 들어와서 사람처럼 걸어다니기도 했습니다. 인폼센터의 직원분은 꽤나 신경질적으로 안내를 해주시는데 한국의 경우와는 너무나도 다른 경험이었기 때문에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혹시나 소련의 잔제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소비자보다 공급자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차는 한국의 것과는 다르게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객실이 마치 방처럼 아주 작게 나눠져 있었습니다. 장 시간 열차를 이용하거나 국경을 넘는 일이 잦기 때문인듯합니다. 한국이 통일되어 우리도 열차를 타고 유럽까지 갈 수 있다면 한국의 열차들도 침대칸 등의 긴 여정을 위한 준비를 할 것입니다. 방으로 되어 있는 열차는 낯설기 때문인지 왠지 낭만적입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철로 주변의 벽들에는 빼곡하게 그래피티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발길이 닿기 힘든 위치에 있는 터널 안에도 있었습니다. 
프라하에서 출발한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창밖엔 어느새 전원적인 풍경이 펼쳐집니다. 몇 정거장만 더가면 목적지인 코트나호라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방송이 잘 들리지 않고, 게다가 체코어는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긴장을 해야만 했습니다.
어느덧 창밖은 끝없는 논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한국에선 보기 힘든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지난 폭설과 한파로 눈이 깊게 쌓여있기 때문에 듬성듬성 나무가 보일 뿐 하늘과 땅이 모두 하얗습니다. 끝없는 지평선을 따라 눈을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지평선이 사라지는 착각을 할 정도 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는 이곳을 우리의 기차는 묵묵히 달리고 있었습니다. 

듬성듬성 보이는 나무들은 한국의 나무들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습니다. 굵은 줄기의 아주 낮은 부분부터 가지가 자라있었습니다. 아마 차가운 눈으로부터 줄기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생긴 것같습니다. 수업시간에 봤던 독일의 어느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나무와 닮아 있었습니다. 간이역 근처에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내려서 걸어보고 싶었지만 사정상 그건 접어두고 창밖에서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프라하와 마찬가지로 집들은 저마다의 취향에 따라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삭막하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발랄하지도 않았고 적당히 평화로웠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눈밭은 포근한 인상을 줍니다. 눈이 차갑지 않은 이유는 눈이 자신의 발밑에 생동하고 있을 봄의 기운을 품어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다녀간 지 몇달이 지나면 끝없던 눈밭은 끝없는 곡식으로 그 옷을 갈아입고 있을 것입니다. 그 모습또한 담고 싶은 욕심이 납니다.

코트나 호라에 도착한 후 같이 내린 관광객들을 따라 마을의 중심부로 이동했습니다. 이 동네는 외곽지역의 작은 시골마을이였으며, 마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기차에서 느꼇던 시골마을의 평화로운 이미지들은 깨졌습니다. 한국의 시골과 같이 이곳의 시골도 지나치게 적막했기 때문입니다. 생기를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관광책자에는 24일을 제외한 다른 날들은 모든 관광지가 개방되어 있다고 쓰여있었지만, 모든 관광지는 닫혀 있었습니다. 심지어 인폼센터도 닫힌듯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골성당 근처를 방황하다가 첫 외국인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아자르 알쉐리프 Azar alsharif였습니다. 노르웨이인인 그녀는 가족들과, 남자친구와 함께 프라하 여행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프라하에 있다가 코트나 호라에 왔는데 그녀의 가족들도 닫혀버린 관광지에 당황해하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남자친구를 제외한 그녀의 가족들은 이란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아자르의 어머님이 감기에 걸리셔서 실내로 빨리 옮겨야 했는데 거의 모든 식당이나 카페가 닫혀있어서 '우리'는 다시 기차역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그녀와 그녀의 동생, 남자친구는 모두 미술을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아자르의 남자친구인 호아바르 에게라이드haavar eggereide와 일행의 맨앞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빨간띠까지 태권도를 배운적이 있고 막대기를 들고 싸우는 합기도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안녕하세요","감사합니다""아니요" 정도의 한국말도 할 줄 알고 있었습니다. 뜻은 모르고 있었지만 아마 태권도학원에서 배웠었나봅니다. 그리고 자신의 학교 친구 중 하나는 서울에 있는 예술학교로 교환학생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르웨이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의 경관만이 떠올랐습니다. 호아바르는 노르웨이엔 산과 바다가 있고 눈이 있다고 했습니다. 호아바르는 서울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도 아름답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평생 나고 자란 서울은 아름다운 도시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익숙해진 나에겐 아름다움을 경험하기엔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이었고, 호아바르에게 그 아름다움을 추천하기엔 휴전중이라는 부끄러운 현실은 그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매우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호아바르는 전쟁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내 머리 속의 노르웨이에 대한 이미지는 아름다운 자연과 연관지어 스키 등의 겨울스포츠로 떠올랐습니다. 노르웨이 인들은 스키를 얼마나 잘 타냐고 물었더니, 물론 경사가 급한 산들이 많아서 흔히 우리가 스키라고 말하는 다운힐도 유명하지만 구릉지대도 많이 있어 크로스컨츄리도 즐겨서 한다고 합니다. 동계올림픽을 보면 크로스컨츄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은 지형적인 특성때문에 다운힐을 하는 슬로프만 있다고(사실 우리 학교안에 크로스컨츄리 코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얘기했더니 다운힐을 하기엔 알프스가 좋다고 얘기해줬습니다. 누구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크로스 컨추리는 스키를 타고 말그대로 컨츄리를 크로스하는 운동입니다. 매우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운동같아 보여서 그것을 누구나가 즐기기엔 힘들지않냐고 물었더니 힘들지만 재미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부활절기간이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로스컨츄리를 한다고 합니다. 맑은 햇빛을 받으며 스키를 탈 때가 그는 특히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코트나호라역에 도착한 후에야 우릴 뒤따르던 일행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기차를 기다리며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자르의 아버님은 축구를 좋아하시는데 얼마전에 있었던 국가대표 경기에서 박지성이 골을 넣었다고, 그래서 이란이 졌는데 박지성을 아냐고 물으셨습니다. 박지성은 훌륭한 선수라고 말씀드렸더니 동의하셨습니다. 그리곤 K리그에 뛰고있는 이란의 선수를 물으셨는데 우리는 몰랐지만 아는척 대답을 했습니다. 
노르웨이의 남자들도 군대를 가야한다고 합니다. 복무기간은 1년인데 공익이나 현역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전문직으로서 뭔가가 있으면 안가도 된다고 했습니다.(확실한 것은 잘 모릅니다만 부러웠습니다.)
아자르와 호아바르는 함께 미술관에서 일하며 돈을 법니다. 아자르의 부모님은 오슬로 지방에 살고 계시며 이들은 오슬로보다 서쪽에 있는 또 다른 큰 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아마 학교 때문인듯 합니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여자친구의 부모님과 여행을 한다는 사실은 정말 부러웠습니다. 
이들에게 이메일로 내 작업들을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내 작업을 보고 매력적이라고 칭찬해줬으면 좋겠지만 쓴소리도 반갑게 들을 여유가 있습니다. 호아바르는 우리에게 자판기에서 코코아를 대접했고, 우리는 한국에서 선물용으로 준비해온 소주를 나눠주려 했습니다. 노르웨이인들은 맥주도 많이 마시고 꼬냑도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 기차에 타서 내일의 일정을 얘기했습니다. 
아자르의 어머님이 많이 편찮으셔서 못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서로 숙소의 위치도 정반대 방향의 극과극에 있기 때문에 무리가 있어보였습니다. 
하지만 코트나호라의 관광지들이 열려있었더라면 이들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인연이라는 위대한 이끌림은 문자 그대로 위대합니다. 다행히 인터넷이 있기에 이 소중한 인연을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습니다.

코트나호라가 닫힌 덕분에 예정보다 일찍 프라하에 도착하여 숙소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숙소는 아침과 저녁을 준비해주시는데 코트나호라의 여행은 즉흥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 연락없이 저녁시간에 귀가하지 않으면 주인장 형님이 걱정하실 것 같아서 내심 다행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프라하역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자르 가족과의 이별 때문이었습니다. 헤어짐에 익숙해지기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만남과, 나아가 재회의 가치는 더욱 빛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라하역에서 또 길을 헤매다가 어느 분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까를교까지 안내해주시며 까를왕의 업적에 대해 이야기해주셨고, 집들마다 걸려있는 밀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신의 16살 아들이 캄파섬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했다던지, 까를교가 13년 전까지만해도 트램과 자동차가 다녔다던지, 성당의 외벽이나 역사적 건물에 빔프로젝터로 그 건물의 역사적 배경을 애니메이션으로써 보여주는 작업을 기획하고 있다던지하는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까를교를 건넌 후 우리에게 커피를 대접해주겠다고 하셨으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숙소의 주인장 형님 생각에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을 볼 때마다 혹은 프라하를 떠올릴 때마다 그 사람의 친절함은 두고두고 추억될 것입니다. 

함께 숙소를 쓰는 예술가부부가 있는데 까를교 위에서 재즈를 연주하는 할아버지 밴드와 사진을 찍었다고 자랑했습니다. 프라하의 명물 중 하나로 소개되는 이 밴드의 사람들이 이 부부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프라하를 찾는 한국인이 많은 모양인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