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낀 대로 한 번역입니다. felicitas thun이 펠리씨타스 툰이라 발음하는게 맞나 모르겠네요.
물론 잘못 번역한 부분이 더 많겠지만..
펠리씨타스 툰(이하 ‘툰’):
당신의 모든 작품들은 당신이 쓴 글들과 무관하지 않지요?
디터 로쓰(이하 ‘로쓰’):
나는 항상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어릴 땐 학교에 나가는 것 조차 견딜 수가 없었지요. 17살 때 스위스에 직업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거기서 날보러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을 했어죠. 그 후 나는 견습생이 되었고 나중엔 그래픽 디자이너도 되었지요. 비록 나는 항상 시인이 되고 싶었고 실제로도 시를 항상 쓰고 있었지만요. 우리는 1963년에 Spirale이라는 잡지를 발견했어요. 나는 그들에게 내 시들을 보여줬는데, 그들은 내 시가 너무 센치하다고 했지요. 그래서 나는 그 시들을 폐기해버렸고, 그냥 미술에 전념하기로 했어요. 난 1966년까지 아무 시도 쓰지 않았어요. 이제 그 시인은 죽은거예요. 나는 그것들을 널판지 위에다 쌓아 올리고 못으로 박아뒀어요.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마침내 그것들을 아레강에다 흘려 보내버렸지요. 누군가가 그것을 발견하길 바라면서요.
툰:
1953년 이래로 당신의 작업에는 구상미술로 나아가고자 하는 강한 집착이 드러나요. 스위스가 그런 분위기였지요. 당신만의 즉흥적이거나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물질들을 다루는 성격들이 뭔가 억제되었던 것처럼 보였어요. 그것 스스로를 명료하게 만들기도 전에 자진해서 영향을 받은 채로 말이죠.
로쓰:
롤프 이셀리Rolf Iseli, 피터 마이어Peter Meier, 발터 보젤리Walter Vögeli와 나는 베른에서 '갤러리 33'이라는 곳을 운영했어요. 그리고 우리의 그림들을 거기서 전시했었죠.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옵아트 작업들이 거기서 행해졌었어요. 빨강과 초록의 대조가 미친 듯이 깜빡 거렸었죠. 나는 알류미늄 판에 기스를 내서 광택이 나는 곳과 광택이 없는 곳의 대조를 만들어 냈어요. 이것은 제가 아이슬란드에 정착할 때까지 계속 되었죠. 하지만 아이슬란드에선 더 이상 구조주의적인 작업을 할 수 없었어요. 그 동네에선 선명한 색을 구할 수 없었고, 따분한 색뿐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나에게 가능한 재료들을 가지고서 작업을 해야만 했죠. 나는 꽤나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가정에선 불화가 있었습니다. 나는 망가졌고, 작업하는 것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나는 1960년 바젤에서 팅겔리Tinguely의 전시를 보았는데, 자기 파괴 기계들이 여기저기에다 물건들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질투에 불탔고 심지어 더 우울해졌습니다. 팅겔리는 나에게 바람직한 것들을 만들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난 내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구조주의적인 작업들을 모두 멈추자!” 이 것이 바로 팅겔리에 대한 반응으로 첫 번째 다이어리가 만들어졌던 날입니다. 구조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내 의식의 변화는 1960년에 일어났죠.
Dieter Roth,
Notebook, 1967 (detail),
Hardcover leatherbound diary with drawings, coloured sketches, collages,
17.5 x 11 x 3 cm.
툰:
당신은 1958년 이후 주기적으로 미국에 가면서 거기서 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1960년 이후의 그래픽 아트의 맥락에서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나 제스퍼 존스Jasper Johns의 작업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로쓰:
유럽의 그것과 비교해 봤을 때, 미국의 예술가들은 즉각적으로 유명해집니다. 그들은 갤러리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고 그들의 작업에선 그런 것들이 과시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요. 그들의 작업에 대한 어떠한 실험적인 것도 없지요.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예술가의 고된 삶이란 것은 미국에선 존재하지 않아요. 이는 유럽의 예술가들이 과거에 중요한 인물들—늙은 왕, 장군, 혹은 신—이 예술의 중요한 문제였던 시대로 돌아간 것과도 더 같아 보여요. 왕이 폐위를 하고 그 예술이 재미가 없어지면, 누군가는 그 왕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만들어낼 준비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왕과 대조되는 서민적인 것—암퇘지나 황소 따위의 것—들 말이죠. 예술적 성취를 찬미하려는 의식은 잊혀진 듯해요. 누군가는 심지어 그런 것들에 저항하기도 하지요.
내가 보기에 미국인들은, 우리의 세상에서 값이 나가는 부분들을 찬양하거나 값이 나갈 만한 것들만 보는 것 같아요. '그림'이라고 일컬어지는, 말레비치Malevich의 <Black Square>를 봅시다.
Kazimir Malevich,
Black Square, 1915,
Oil on Canvas,
106 x 106 cm.
미술관은 이것들을 옹호하고 있어요! 한편, 로쏘코Rothko도 찬양 받는 대상을 만들어낼 시도에 그 표면이 열리기를 엿보고 있지요. 이것은 물론 쓸모 없는 짓 이예요. 미국의 예술가들은 유럽의 예술가들이 현실적인 진실을 탐구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실패했어요. 사실 그 길은 안락하고 예쁜 길과는 거리가 멀었거든요. 심지어 표현주의자들도 가치 없는 것들을 그리려 했었어요. 라우센버그와 제스퍼 존스 또한 절박감에서 시작했어요. 나는 뉴욕에서 제스퍼 존스가 그린 성조기를 봤어요. 그건 그게 막 완성되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역시 그 작품은은 현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지 자원낭비에서 끝나있었어요.
Jasper Johns,
Flag,1954-55,
Encaustic, oil, and collage on fabric mounted on plywood, three panels,
107.3 x 153.8 cm.
난 1950년에 뭔가를 경험했죠. 그건 내가 어렸을 때도 종종 느꼈었던 것 이예요. 당신도 이게 뭔지 알 겁니다. 누군가는 뭔가를 그리고 그 다음 그걸 미친 듯이 훼손하죠. 그는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망치는 것을 멈출 수도 없이 색을 칠할 뿐이죠. 만약 당신이 이런 경험이 있다면, 내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이해할거예요.
망가뜨리고 파괴한다는 결과는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걸 실패했단 의미였어요. 그 것을 깨닫고선 나는 이를 수년간 나의 방법으로서 활용해왔죠. 글쓰기랑도 같아요. 나는 나의 최초로 망친 시(Scheisse Gedichte)를 파괴하려 했었죠. 그때 내가 그럴 수 없었던 기분은 훗날 내가 미국에서 학생들을 모으고 타이포그래픽 작업까지 파괴하도록 지도하게까지 만들었어요. 그리고 나는 문득 말래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실패라는 감정으로 만들어진 작품일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누구도 더 이상 묘사하지 못했던 지점이 있다 해도, 누군가는 항상 거기에 도달하지요. 여하튼, 나는 항상 자연주의적인 행동으로 퇴보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하루하루 연명하거나 매일이 기쁨과 두려움만으로 설명되는 그런 삶이요. 그런 삶엔 딱히 갖춰야 할 기술이 필요 없어요. 말하는 것과 약간의 그림들이면 충분하죠. 이는 점점 더 단순해져요. 나는 어려움들은 그냥 외면해요. 그런 나의 작업은 일상과 그 일상의 기저에 무엇이 깔려있는지에 대한 설명이구요.
툰:
그렇다면, 당신의 작업 속에서 반복되는 파괴도 당신의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으로서의 예술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로쓰:
내 생각에, 작업 속에서 그것들은 각각 변하는데, 그 작업들은 처음엔 무의식적으로 현실적인 얘기들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곧 굉장히 의식적이 되지요. 나는 내가 벽에 그림을 전시함으로써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발명하고 싶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고, 한 적도 없어요. 50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내 자신이 내가 문학이나 미술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독점할 수 있게 되길 의도했어요. 나는 성공하기 위해 그것의 일부가 되고 싶었었죠.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지나친 음주와 이혼은 나를 그것들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게 만들었어요. 나는 그림을 '제작'하는 일원이 되길 거부했고, 그리고 그 때 부터 내 경험의 저장고에선 나만의 주제들이 나오기 시작했죠. 나의 이미지 창고는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가득 차 있어요. 난 외출을 하면 모든 것들을 사진으로 찍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글을 남겨요.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글쓰기를 하면서도 내가 쓸 이미지도 얻는 방법이 예요. 이는 그림을 그릴 때, 아직 찬미 받지는 못하지만 내 흥미를 끄는 이미지들을 즉흥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줘요. 물론 그 결과, 미술관에 들어가는 것이나, 매력을 끈다거나, 걸작이 되는 둥의 것과의 거리는 생겼지요. […]
Dieter Roth and Felicitas Thun, extract from interview (Basel, February 1998), In Dieter Roth: Gedrucktes Gespresstes Gebundenes 1949-1979(Cologne: Oktagon Verlag, 1998); reprinted in Flash Art International, vol. 37, no.236 (May-June 2004) 104-5.
디터 로쓰의 회고전 웹사이트:
http://www.moma.org/interactives/exhibitions/2004/dieterroth/rothtim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