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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art Morgan「The man who couldn’t get up; Paul Thek」(1995)

by AKHWEE 2013. 9. 24.

세상엔 이를 악물고, 전략을 짜고, 작업을 하며 결국 성공해내는 예술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폴 텍(이하 ’) 같은 예술가들도 있을 겁니다. 즉흥적이고 탈속적이었으며, 세상에 환멸을 느끼던 사람인 텍은 1988년 죽을 때까지 많은 사람들과 협업으로써 작업을 했습니다. 오늘날 로테르담의 Witte de With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은 사진과 영상, 일기, 조각, 설치와 회화를 통해 그의 경력들을 다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텍이 경험한 초기의 성공과 후기의 실패는 단순히 잘나갔던 시대의 한 부분을 상실한 것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여행, 교감, 축제, 마약과 방탕함, 그리고─ 아마 무엇보다도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삶을 프로젝트로서 이해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1960년대의 높았던 희망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지요. 텍이 말했었던 ‘The Wonderful World that Almost Was(회고전의 제목임)’ 는 이제 냉소거리이고, 꿈이고, 이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1963, 팔레르모에 있는 카타콤에는 잘생긴 청년이 해골을 뒤에 정렬해놓고 팔짱을 낀 채 서있었습니다. 그 스냅샷은 초상화로서의 성공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그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주제는 배경과 이질적으로 보였습니다


Peter Hujar, Paul Thek at Palermo Catacombs, 1963


같은 사진작가에 의해 찍힌 두 번째 사진—11년 후 머리와 어깨가 찍힌속의 주인공은 나름대로 여전히 잘 생겼지만 쳐진 눈과 가느다란 머리카락 그리고 이마 위엔 주름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과거의 매력적이었던 모습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 것입니다. 다만 오직 하나의 단서만이 이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때의 정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우리는 그 둘을 동일인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여전히 팔레르모의 카타콤들 안에 있을 것입니다


Peter Hujar, Paul Thek in Black T-Shirt, 1975. Pigmented ink print, 41 x 51 cm.



거기엔 8,000 구의 시체가 있었다. 해골과 시체들이 벽을 꾸미고 있었고 복도는 창이 난 관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 중 하나를 열어 종이 조각 같이 생긴 것을 들어 보았다. 사실 그것은 말라버린 허벅지였다.’라고 그는 그 상황을 묘사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그의 반응은 언제나 비정상적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곳에서 안락함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시체들로 꾸며진 방은 마치 꽃처럼 나를 밝혀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60년대 말, 폴 텍의 작업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의 작업 도판이 예술 잡지들에 실렸고, 비평가들은 그를 인터뷰 했습니다. 수잔 손택Susan Sontag1966, 심지어 그녀의 위대한 저작인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를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의 노트 중 1979년에 쓰인 하나를 읽어봅시다. ‘나는 고통을 느꼈다.’,  ‘누군가는 나를 일으키기 위해 애썼지만, 나는 아주 깊은 곳으로부터 고통을 느꼈고, 그들은 그런 나를 남겨둔 채 그들 자신 만의 성공에 대한 희망, 또는 실패를 찾아 하나 둘 나로부터 떠나 자신의 삶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나는 또 실패했고, 그러나 그들 중 누군가는 또 나를 격려했고, 일으켰고, 심지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유혹했다. 하지만 삶은 항상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 알고 있었다. virginal dentifrice(무슨말인지 전혀 모르겠음.)처럼, 그의 머리 속은 은총으로 가득 찼다.’ 익살 반, 비애 반인 그의 어조는 60년대의 멋진 유머를 연상시켰습니다: 요셉 헬러Joseph Heller나 테리 써던Terrry Southern과 먼 곳에 숨어 있는 나다니엘 웨스트Nathanael West이 썼던 어조말입니다. 어쩌면 이를 그 스스로가 꾸며낸 자기-연출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강박과 자기연민이 계산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지 모르고 그 속에 아무리 많은 계략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울부짖음은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최소한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초기 칸딘스키를 연상케하는 역겨운 색깔들로 그려진 장식적인 회화는 처음 본 순간부터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그들의 그런 오류들을 교훈삼아 이는 텍에 의해 1963년부터 시작된 <Television Analyzations>라는 작업으로서 다시 나타났습니다


Paul Thek, Untitled (Woman with a Pearl & Ruby Necklace) (from the Series "Television Analyzations"), 1963, Oil on Canvas, 150 x 150 cm.


하나의 이미지는 모두 같은 입, 가슴, 목걸이를 한– 복제품들의 행렬 같아 보이는 여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모두 저렴한 미소를 띠고 있고, 그들의 긴 손톱을 모아 성당 모양을 만들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눈에 띠는 것은 그녀의 비비드한 빨간 목걸이 입니다. 이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회색입니다. 또 다른 ‘analyzation’, 여자의 얼굴의 한 부분을 다시, 그녀는 입을 열고 있고 살찐 혀가 보입니다. 다른 이는 과일막대기를 안고 있습니다. 그는 여자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노트에다 독자들더러 보란 듯이 남겨놨습니다. 그의 불신은 거의 증오에 가까울 정도로 깊어져 있었습니다. 이 그림들은 언뜻 여성의 성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거리 효과 보호 감각은 제공합니다. 무한으로 환원됨으로써, 텔레비전 화면 위의 간섭과 맞먹게 그려진, 촉각을 타이트하게 좁히거나 넓힘으로써, 열린 입처럼- 모든 것들은 설명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송곳니를 드러내십시오, 관객이 (혹은 작가 스스로가) 동물적인 힘을 마주한 것처럼 말입니다. 먹기 위해선 이를 드러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웃기 위해서도 그래야 합니다. 텍에게 먹는 것이란 소비와 사회를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이는 절묘한 솜씨로의 매우 대담한 공격인 것입니다.

옆으로 눕혀진 상자가 있습니다. 다른 모두와 똑같은 문구를 드러내고 있지요. 거기엔 ‘New’ 그리고, ’24 Giant Size Pkings/ Brillo Soap Pads with Rust Resister/ Brillo Mfg. Co. Inc. NY/ Made in USA’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상자의 바닥 면에 있는 플렉시 유리 안을 들여다 보면, 우리는 질겁하게 됩니다텔레비전 같이 생긴 프레이밍 도구가 된 박스 안에서 혓바닥과 입에서의 모티프들은 소비사회와의 전면전을 치르기 위한 3차원으로서 전환되어 있습니다


Paul Thek, Meat Piece with Warhol Brillo Box ( from the series "Technological Reliquaries"), 1965, Wax, painted wood, and Plexiglas, 35.6 × 43.2 × 43.2 cm


‘No ideas in but things’라고 워홀은 암시했었습니다. 이에 ‘No idea but in flesh’라고 텍은 응수합니다. 이 공들여 색칠한 플라스틱 상자 속에 생고기와 비슷한 덩어리가 들어가 있는 작업은 <Technological Reliquaries>라는 시리즈에 속해 있습니다. 브릴로 상자를 선택한 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입니다. 텍이 팩토리를 가봤거나 워홀을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는 그를 비꼬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란 데엔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워홀 그 스스로 뿐만 아니라 그가 을 이해하는 개념미술이 될 수 있었던– 특정한 방식까지 말입니다.

장례는 텍의 작업들 기저에 있는 또 다른 의례입니다. ('내 작업은 시간에 대한 것이다. 시간은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타락이다.'그의 노트에 쓰여 있습니다) 60년대의 가장 유명한 설치 작품 중 하나인 <무덤The Tomb>(1967)은 지구라트 모양의 방안에 실물 크기의 작가 본인의 시체가 놓여있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는 그의 유물들로 둘러 쌓여 있습니다


Peter Hujar, Thek Studio Shoot Tomb Effigy From Above 5, 1967. Color slide.


Paul Thek, Tomb, 1967, installation.



Paul Thek, The Tomb, 1967 (exterior view), as seen at Stable Gallery, New York, 1967.



이 작업은 어느 정도 사적입니다. (텍의 유년시절 침실은 지구라트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작업을 담기 위한 용기를 만드는 데, 그 안을 훑어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지구라트를 뒤집은 모양으로 제작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적인 작업으로 베트남 전쟁의 기념 등의 60년대 문화들과의 작별을 보여주기 위해서 휘트니 뮤지엄의 단체전에선 여기에다 <Death of a Hippie>라는 잘못된 부제를 붙이기도 했습니다. 텍은 이 작업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에 짜증이 났습니다. 그의 사적인 작업들을 역사적인 작업으로 오해하는 것은 그가 몸을 캐스팅했던 시기에 절정으로 드러났었습니다. 나비날개로 치장된 갑옷 속의 팔도 이러한 오해의 사례로 들 수 있겠습니다.


Paul Thek, Warrior’s Arm ( from the series "Technological Reliquaries"), 1967, Wax, paint, leather, metal, wood, resin, and Plexiglas, 24.1 × 99.1 × 24.1 cm


땋은 머리, 금 장식품들, 개인적인 편지들과 식기, 이와 함께 작가 본인의 몸을 밀랍으로 떴던 <Tomb>는 <Fishman>(1968)이라는 작업으로 계승됩니다. 그 작업에선 나는 건지 엎드린건지 뒤집혀 있는 남성의 몸 위엔 종교적인 상징으로서의 물고기들이 덮혀 있었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라며 갈릴리 해안에서 예수는 자신의 원칙을 선언합니다.)


Paul Thek, Fishman, 1968.



Paul Thek, Fishman in Excelsis Table, 1970−71. Mixed media: wood, latex, wax, metal, paint, fabric, string, and Styrofoam, 75 × 90 × 239 cm.


<Fishman>은 관객들의 머리 위에 설치된 테이블의 아랫면에 붙어서 밑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그때 관객들은 자신의 해석과 작가가 의도한 것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어쩌면 관객들은 알 수 없는 뭔가 다른 더 중요한 무엇이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거기엔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텍과 그의 작업 사이의 관계가 명확해질수록, 관객들은 그의 작업을 자기중심적인 작업으로서 받아들이길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술적인 대립 또한 텍의 결심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1968년 그는 에센에 있는 텔렌 갤러리에 초청됩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운송 중에 훼손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는 전시를 강행하고선 매일 갤러리에 나와 앉아 조각들을 수정하기로 결심합니다. <A Procession in Honour of Aesthetic Progress: Objects to Theoretically Wear, Carry, Pull or Wave>는 과정과 행렬이라는 말에 대한 그의 관심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말들은 그가 이후의 협동 작업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곤 하게 됩니다. 에센에서 그가 보여줬던 순수한 기이함은 전달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의자를 계속해서 수정했고, 의자들이 훼손되는 것에 적응했습니다. 결국엔 그의 머리가 시트 위로 튀어나오기도 하고, 처음엔 신문지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기도 했었습니다. (이것들은 그의 영속적인 예술적 용어가 되었을 것입니다.)


A Procession in Honor of Aesthetic Progress: Objects to Theoretically Wear, Carry, Pull or Wave around the time of the exhibition’s opening, 1968.


Installation view of Paul Thek: Diver, A Retrospective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October 21–January 1, 2011). Photograph by Sheldan C. Collins



당시의 텍은 보이스Beuys의 작업을 처음으로 봤었습니다. 그리고는 워홀의 자유로운 성적sexuality인 태도에 더욱 강하게 반응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모든 것들은 화려함, 가치, 매력 그리고 여자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라고 텍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보이스와 워홀 사이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단 적은 괴리가 있었습니다. 보이스는 시각 언어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텍은 자신의 방식은 가족을 입양하는 것과 더 유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Tomb>으로부터 나와 히피의 모습은 메인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Fishman>도 그랬고, 그리고 아시리안 수염 때문에 앗수르바니팔이라 불리는 거대한 라텍스 난쟁이도 그랬듯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텍은 가족을 입양하며 살았고, 작업을 했습니다. 그는 존재하는 요소들에 계속적으로 적응하고 다시 적응하였고, 융C.Jung이 세계적인 신화에 접근했었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의미로 가득참을 지향하며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Paul Thek, Dwarf (Assurbanipal), 1969, 140 x 56 x 43 cm.


잭 스미스Jack Smith의 영화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의 영향을 받아, 텍은 즉흥성을 극한까지 밀어붙혔더니 사진들은 행렬만을 남겨 두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치 작업에서 다루고 있는 '행렬' 이란 단어─'과정'이라는 말의 안정된 상태를 의미함─과 여정은 종교적 예배와 세속적 축제를 비슷한 위치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앗수르바니팔 이후에 작업인 <The procession/The Artist's Co-op>(1969)는 줄지어진 의자들과 병, 냅킨, 밤에 마시고 남은 술이 놓여 있는 테이블이 있고, 심지어 <The Procession/Easter in a Pear Tree>(1969)에서는 그런 일상품들과 함께 커다란 십자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Installation view of Paul Thek’s The Procession/The Artist’s Co-op (Stedelijk Museum, Amsterdam, 1969).


축제를 즐기고, 이탈리아인들이 명절날 집을 꾸미는 방식을 좋아했던 텍은 숭배와 기념이라던지 종교와 세속을 이분법 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번엔 실제 사이즈인 <Another Pyramid>(1971)가 등장합니다. 탁자와 의자들, 더 많은 신문들, 앗수르바니팔의 또다른 행렬들, 천장에 매달려 있는 <Fishman>, 분수, 분홍 화산, 등... 여기에 놓인 것들 간 경계의 구분은 없어 보였습니다.


캡션을 구할 수 없음. 이미지 출처: http://www.lespressesdureel.com/


Installation view of Paul Thek’s Pyramid/A Work in Progress (Moderna Museet, Stockholm, (1971-72). Photograph by Erik Cornelius.


전기작가Biographer들은 아마 전에 텍이 느꼈던 고통과 고난들이 가족이나, 안정, 안락, 신념,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가정 생활을 요구하도록 이끌었다고 설명하려 할 것입니다.(그가 동업자들을 계속 바꿨던 이유도 그렇게 이해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그런 종류의 안정성을 갈망했었다면, 이는 선(線)적이지 않고 순환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다소 중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 은 아마 구시대적인 것들이거나 심지어는 예술에 대한 정적인 태도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그가 관심을 가졌던 행렬이란 구조는 그 팀이 자신의 작업을 재활용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아마 (말하자면) 원리를 반복하는 직원들에게 인디언 라가Ragas의 그것과도 유사한 기회를 제공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20세기전의 예술가들처럼, 텍과 그의 팀은 미에 대하여 공유되는 이론을 따라야 하는 결정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텍과 그의 팀)의 이론은 그들만의 발명품이었다는 점에서 20세기 전의 예술가들이 따랐던 이론과는 대조되지만 말입니다

수 년 동안 텍에겐, 직업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72년 초 텍은 그의 오랜 동료인 프란츠 덱비츠Franz Deckwitz에게 '짙고, 깊게'라는 글의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예술 뿐만이 아닌, 휴식과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장소를 만들고 싶다.' 실제로, 그의 삶의 무대에서는 예술가로서의 경력과 속세로부터 은퇴하고자 하는 것 사이에서의 강한 갈등이 존재했습니다. 그 당시 그의 신념은 버몬트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명상을 하면서 뒤틀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생계를 만드는 것에 실패했고 박물관이 그의 작품을 영구적으로 보관할 공간이 더이상 없다고 통보했지만, 필라델피아의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ICA)에서 열린 수잔 델라한티Suzanne Delehanty가 기획한 텍의 거대한 회고전에서는 그의 영향력이 아마 다시 돌아왔던 것 같습니다. 텍의 생각은 틀렸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1975-76년 경 그의 행운을 포기해버렸습니다. 1978년까지 그는 뉴욕의 수퍼마켓에서 일했었고, 그 후 병원에서도 청소부로 일했었습니다. 그 후,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어했던 그의 소망까지도 의사가 가로막아 버립니다. 그는 HIV 보균자 진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쯤 텍은 자신의 소지품을 쥐들이 갉아 먹게 내버려 두는 모양으로 놓여있는 <Personal Effects of the Pied Piper>라는 청동 조각 시리즈를 통해 예술 창작 뿐만이 아닌 한 사람의 삶을 이끄는 수단으로서의 그의 순진했던 헌신을 다시 보여주기 시작합니다일반적으로 그의 과민한 정신은 한가지 주제에 오래동안 정착하는 것을 거부하게 했습니다그리고 '피리부는 사람Piper' '미스터 보쟁글Mr. Bo jangle(Jerry Jeff Walker의 노래임)' <엉클 톰스 캐빈>과 섞였습니다. 한편 '타 베이비Tar Baby(엉클 리무스Uncle Remus에 나옴)' 또한 그 짬뽕 행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Tar Baby, 1975-76.

Paul Thek, The Personal Effects of the Pied Piper, 1975, Cast bronze mice and objects.



그의 설치 작품들에서 계속 등장했었던 신문들은, 그 때에 이르러선 그림을 그리기 위한 화면이 되었습니다. 텍은 바로 그가 소돔과 고모라라고 불렀던 반 정도 지어진 세계무역센터가 보이는 뉴욕의 그 모습을 "때때로 종교적이고, 종종 풍자적이었고, 자주 종말론적이었으며, 항상 속세에 환멸적이었다"라고 보는 그런 극단에 있었는 남자였습니다. (10년 후 그는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 <Tilted Arc> 프로젝트(후에 작품명이 <Tilted Ark>로 변경됨)에 꽃이 있는 작은 동물원과 공원과, 별 모양의 구멍이 지루하게 뚫어 그 만의 완전히 비현실적인 <Title Arc>를 만들었습니다.) 


Paul Thek, Untitled, (Sodom & Gomorrah with Hot Potatoes), 1972.


Paul Thek, Untitled (Chrysler Building), 1983.


Paul Thek, Red Empire Building, 1983.




Paul Thek, Tilted Ark, 1985, Watercolor, pencil on paper 48 x 60.5 cm

Paul Thek, Titled Arc II, 1985. Graphite and watercolor on paper, 19 × 25 in. (48.3 × 63.5 cm



아직 회화는 평가하는 보편적인 기준은 없지만 진실한 시선으로서 우리를 눈멀지 않게 해주는 힘은 있습니다. <Uncle Tom's Cabin in Flames> <Bo Jangles in Flame>(1979)는 미국의 종말을 예고합니다. 1980년까지 텍은 <Turquoise Potato Peelings in a Sea of Piss and Shit>같은 제목의 작품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의 제목들은 기발합니다. 누가 <Church of the Holy molar, Fascist Grapes or Neolithic Porno>같은 제목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Paul Thek, Bo Jangles in Flames, 1974, Oil on newsprint, 57.3 x 74 cm


하지만 지난 텍의 삶이 그에게 최상의 예술을 하도록 일으켰던 것인냥 말하는 것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한 번 그의 지난 삶의 씁쓸함과 환멸과 고통은 배제하고 1977년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그의 회고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한 번 그가 만들어 놓은 캠프(피라미드 설치 현장 같은)를 상상해 봅시다. 지성이라 할 수 있을 정도 만큼으로 초라하게 자란 텍이 모래 바다 앞에 있는 관객들에게 '지금이 물 위에서 당신은 걸을 수 있다.'라는 쓸데없는 설명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천박한 숲과 동물들, 나무로 만든 타틀린 타워의 모형, 킹콩, 피카소의 오마주, 그리고 또 등장한 워홀의 브릴로 상자, 욕실과 판자집, 그리고 새들 그리고...이런 것들을 이상의 것들도 상상해 봅시다.  하지만 사람들이 텍에게 그만해달라고 한다해도 그는 그 말엔 신경도 안 쓸 것입니다. 그의 그림이 보여주다 시피, 그는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옳았습니다. 그는 절대로 그가 계획했던 것처럼 수도원으로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그를 무시했던 이들과 화해를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Dr Johnson처럼 그는 'good hater'니까요.) 그는 안정적인 상황을 찾아 갈까요? 아니면 그는 계속해서 뭔가 다른 것을, 뭔가 다른 곳에서 직시할까요? 그에게 영감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하고, 혼란되고, 아리송하고 영감을 주는 삶의 모든 것들을 위해 해왔던 것 같은.

 

Stuart Morgan, 'The Man Who Couldn't Get Up', frieze, no. 24 (September-October 1995) 47-50. Reprinted by permission of the Estate of Stuart Morgan and frieze (www.frieze.com).


폴 테크 프로젝트 홈페이지(피라미드 드로잉을 볼 수 있음)

http://www.ptproject.net/publ/photos.php?id=136&pid=35



procession을 행렬말고 다른 뜻으로 옮길 수는 없을까.. process와 구분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