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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us Verhagen「There's No Success Like failure: Martin Kippenberger」(2006)

by AKHWEE 2013. 10. 1.

 마틴 키펜베르거Martin Kippenberger는 지나치게 자신을 과신하는 편입니다. 그는 코메디를 익살극으로 만들고 희가극으로 만든다는 그의 원칙에 따라 작업합니다. 부모와도 같은 과거의 예술가들에게 오이디푸스처럼 반항합니다. 또한 그는 버려지기 쉬운 작업을 만듭니다. 그의 가장 큰 프로젝트마저도, 낙서에서 시작되었고 버려질 수 있는 작품들이어서, 언제든지 변덕을 부려도 무리가 없었습니다. 키펜베르거를 설명할 때 가장 흔하게 반복되는 말은, 그의 모든 유머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진지한 예술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요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확하게도 진지함에 대한 그의 관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진지함을 그의 작업의 그러한—쓰레기 같음이나 카니발 적인 힘이라는— 속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그만의 자산을 훼손하는 관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심각한 분위기에 부딪히려 노력했던 특이한 경우에는, 이상하게도 미적지근한 작품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높은 명성이나 관습화된 지위를 마주할 때키펜베르거는 뚜렛증후군이 있는 사람처럼 (무의식적으로, 반사적으로) 반응합니다. 1984년 그는 큐비즘을 흉내 내서 검은 바탕에서 빨간색과 회색이 소용돌이치는 회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With the Best Will in the World I Can't See a Swastika>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Martin Kippenberger, With the Best Will in the World I Can't see a Swastika, 1984, oil and silicone on canvas,160 x 134 cm.


왠지 모르겠지만 그는 나치 엠블럼을 재배치하고, 그리고선 제목에서 보이듯, 배우지 않은 관객들이 '세계 최고의 의지(best will in the world)'를 갖고서도(혹은 그 제목으로도) 이 난해한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척 했었습니다. 당시 안젤름 키퍼Anselm Keifer를 비롯한 많은 독일의 화가들이 3세계에서의 잔학 행위를 기억하기 위한 책임감 있는 방법을 찾고자 애썼습니다. 키펜베르거는 그 주제를 건방진 방식으로 다루었습니다. 갤러리에 가는 사람 계층을 조롱하고 그 자신만의 도발을 포기(혹은 포기하는 척하는)한 것 같아 보이려 하기 위해, 미혹적인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해 제목을 지었습니다. 사실 그 회화는 상당히 과장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큐비즘 작업을 조잡하고 어색하게 시늉하고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이러한 조잡함이 그 작품의 제목을 위한 단순한 핑계는 아닐지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의 냉소의 대부분은 다른 예술가들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1987년 영향력이 컸던 'Peter'라는 전시에서 그는 쾰른의 Max Hetzler 갤러리를 주문 제작된 가구들과 대충 만든 조각들, 그리고 다른 골동품들을 선별해서 채워 넣었습니다. 그 작품들 중 <Wittgenstein>이라는 작업은, 칠이 되어 있는 목재로 만든 Donald Judd의 조립식 조각같이 생긴 구조물처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옷걸이가 달린 것을 봤을 때 더 명확히는 얇고 박약한 옷장 같기도 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제목이 그 작업의 지적인 지평을 확장하는 동안, 그 조각 자체는 예술가는 저렴한 가구 따위나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비유하고 있었습니다. 

Martin Kippenberger, Wittgenstein, 1987, wood, lacquer, metal, 200 x 100 x 50 cm.


그리고 같은 전시장에 있던 또 다른 작업에선, 키펜베르거는 리히터Richter의 회색 그림 하나를 구해다가 테이블의 윗면으로 사용했습니다. 더욱 뻔뻔해진 오이디푸스적 사보타주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Martin Kippenberger, Modell Interconti, 1987, a 1972 Gerhard Richter painting, wood frame, metal legs, 33 × 79.5 × 60 cm.


 최소한 키펜베르거는 공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보나 보수를 따지지 않고 공격했습니다. 그는 예술가들과 큐레이터들을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그 자신의 외모나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예술적인 진술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비극적 영웅에서부터 술 취한 멍청이까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과장된 연기를 할 수 있었는 그 스스로는, 자기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모델이었습니다. 1978-79년, S.O.36에서 그가 술집을 운영했을 때, 그는 맥주 가격을 올렸다가 얼굴을 구타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기념하여 자신의 붓고 반창꼬를 붙인 얼굴을 회화와 사진 시리즈로 제작하였습니다. 그의 다친 머리를 보면 확실히 빈센트 반 고흐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키펜베르거는 그 오래된 예술-순교자의 이미지를 재활용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뿐이고, 반 고흐의 비애미도 약화되었을 뿐입니다. 

Martin Kippenberger, Dialogue with the Youth of Today (detail), 1981, oil on canvas, 50 x 60 cm


<Dear Painter, Paint for me>(1981) 시리즈 초기에, 그는 다양한 장소에서 찍은 셀카를 모으고, 간판 화가를 고용해서 큰 캔버스에 그것을 다시 창조하도록 햇습니다. 그중 하나는 뉴욕의 길거리에 쓰레기 더미 속에 있는 버려진 소파 위에 앉아있는 자신을 표현한 것이었는데, 여러모로 저렴한 "놈팽이"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실수나 지나친 감상주의 따위는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오히려 그걸 뽐내며 노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Martin Kippenberger, Untitled (from the Series Dear Painter, Paint for Me), 1981, Synthetic polymer paint on canvas, 250.2 x 301 cm.


 그가 맥주캔에 묶인 모습이나 바지를 벗은 모습을 그리는 것은, 그의 외관의 인격에 술취한 허탈감의 아우라를 주고, 자기 스스로를 웃음거리를 만드는 기쁨을 시사합니다. 늙은 파블로 피카소가 그의 그레이하운드 옆에 자랑스럽게 서있는 사진에 영향을 받아, 키펜베르거는 커다란 속옷을 입은 자신을 그렸습니다. 그의 술배를 드러내고, 대담하고 반항적인 자세로, 그러나 풍자적인 효과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키펜베르거는 자신에게 또 다른 모습을 강요했다기보단, 피카소의 자신만만한 남자다움 따위는 몽상에 불과한 허세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오이디푸스와 일치하는 지점입니다. 다만 그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웃음소재로도 사용하긴 했습니다. 키펜베르거는 그들로써 어떤 효과적인 비판을 의도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그림들은 예술가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조소가 단지 그의 실패 만을 드러낼 뿐이라는 유치한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말입니다.

아마 이 사진일듯. 피카소와 그의 개 Lump



Martin Kippenberger, Untitled, oil on canvas, 1988, 241.2 x 201.8 cm.


키펜베르거는 항상 움직였습니다. 이탈리아나, 브라질, 그리스, 스페인, 오스트리아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작업을 계속 햇습니다. 그는 절대 주어진 방법이나 재료에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경력을 훑어보면, 그는 아이디어를 세우는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소진시켜 버리고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기 위해 작업을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그가 선호하는 모티프들의 레퍼토리─개구리나, 계란 후라이, 가로등 혹은 분명히 자화상으로 보이는 몇몇 등─을 계속해서 개발해냈습니다. 사실 그는 자화상이라 보기 힘든 몇 작품들을 사이에서도 어떤 관계가 있게 만들었었습니다. 맥주잔을 들고서 십자가에 매달린 개구리는 확실히 예술가의 대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취해있는 자신과 가로등을 하나로 합쳐, '술취한 가로등'이라는 울렁거리는 형태의 작업으로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게 직설적이든 간접적이든, 그 자신이 투사된 인격에 몰두하는 것은 그의 경력 곳곳에서 지속되는 것입니다.

Martin Kippenberger, Feet First, 1990.


 키펜베르거는 그냥 정신없는 우상파괴자도 아니고, 비평가 Diedrich Diederichsen이 말한 것처럼 'Selbstdarsteller(self-performer/promoter)'도 아닙니다. 그는 또한 전후 독일 사회의 의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독일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의 전망과 열망─에 사악하게 냉소짓는 관찰자도 아닙니다. <Dear Paint...>시리즈에는 정장 겉주머니에 끼워진 펜들을 거대하게 확대한 작업이 있습니다. 그것은 점원이나 중간 매니저의 응용과 능력을 키펜베르거가 그림으로써 요약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술가 그 자신이 입게 한) 이 싸구려 정장은 점원의 페이가 낮다는 것과 그의 주머니 배치가 효율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위태로운 지위와 조심스럽고 방어적인 자존심에 대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Martin Kippenberger, Untitled (From the series Dear Painter, Paint for Me), 1981, 200 x 300 cm.

그리고 키펜베르거는 Ford사의 Capri라는 1970년대 쿠페의 정수인 스포츠카를 드로잉과 사진, 심지어 설치로도 (<Capri by Night>(1982)) 만들어 냈습니다. 이는 움직임과 탈출, 나아가 향상된 기동성에 대한 열망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카프리는 드림카일 뿐, 누구도 그걸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키펜베르거가 피카소처럼 되기 위해 피카소와 비슷한 속옷을 입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카프리란, 온통 실패라고 쓰여진 열폭의 이미지였을 뿐이었습니다. 


Martin Kippenberger, Albert Oehlen, Capri by Night, 1982, Paint, rolled oats, and Ford Capri, 130 x 160 x 430 cm.


 물론 실패는 키펜베르거에게도 강박적인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실패한 예술가라 생각했고, 그의 작품들도 실패한 오브제와 이미지라 했기 때문입니다. 키펜베르거는 능숙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With the Best Will in the World>에서와 같은 서툰 붓터치에 심하게 골몰해 있었습니다. 그는 추측컨대 자신을 'hack(찌라시 쓰는 사람)과 dauber(미장 칠하는 사람)'으로 본 비평가들에게 동의했을 것입니다. 1982년 그는 <Orgone Box by Night>라는 커다란 컨테이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를 버려진 그림들로 가득 체웠습니다. 이는 1940년 정신분석학자인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에 의해 발명된 기묘한 장치의 이름(오르곤 상자)을 딴 작업입니다. 그 상자는 근원적인 에너지(오르곤)를 집중시킴으로써 치유 효과를 얻기 위해 설계된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키펜베르거가 그림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았었을 지가 궁금해야 겠지요). 이것은 제곱으로 실패한 것입니다. 그 상자는 원초적 에너지의 회복에도 실패했고, 그리고 그 예술가도 신용이 없는 공상가(빌헬름 라이히)와 동일시되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카프리를 언젠가 갖는 것을 사회적 진보와 물질적 풍요라는 잘못된 환상으로 보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던─키펜베르거에겐, 실패가 어떠한 매력을 갖는 까닭을 보게 했다는 점에서 이는 성공이나 다름이 없었다는 것 하나 만큼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기능장애에 대한 작업 중 가장 오래동안 지속되었던 작업은 지하철 입구와 환기구를 소재로 했던 <Metro-Net>(1993-97)라는 탁월한 프로젝트였습니다. 한 역의 입구는 그리스의 Syros 섬에 세워졋습니다. 또 하나는 캐나다의 작은 마을인 Dawson City에 지어졌습니다. 이들은 각각 그 지역의 기술과 건축 양식에 의해 만들어져 있습니다. 

The Metro-Net entrance in Syros, Greece



그것들은 경솔한 세계화 체계의 스톱오프stop-off 지점이 되었습니다. 그들만의 지역적 디테일들은 세계적 이동수단과 통신수단들의 중심으로부터 사실상 고립된 그 곳에 재치있게 윤기를 부여합니다. 키펜베르거는 거기에다 또 다른 터무니없는 변형을 추가하여 그 '교통의 요지'가 다른 교통 수단에 의해 운송될 수 있게도 만들었습니다. 제목도 "운송 가능한 지하철 입구Transportable Subway Entrance"입니다.

Transportable Subway Entrance, Madulain, Switzerland.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반짝이는" 변형까지 추가합니다. 그 구조물을 찌그러뜨림으로써 그것이 설치될 뉴욕 Metro Picture 갤러리의 입구를 통과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 구조물이 전시장 입구로 들어갈 수 없었다는 점은 확실하게 키펜베르거로 매력적으로 어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대단한 익살은 따로 있습니다. 그 구조물을 찌그러 뜨림으로써, (입구라는) 전적으로 기능적인 주제를 기능-장애적인 주제로 대대적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부수지 않은 채로 갤러리에 쑤셔 넣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그 장소가 그러한 무용함(기능장애)를 수용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New York Metro-Net Transportable Subway Entrance (crushed), 1997, Installed at Metro Pictures in New York.

 키펜베르거는 알프레드 재리Alfred Jarry의 희극에 나오는 Père Ubu와 조금은 같은 것 같습니다. 엄청나게 반항적인 모습하며, 그의 원초적인 정서와 의심스런 유머의 밑바닥에 닿았던 모든 것들에 활발하게 토를 다는 모습, 쓰레기 더미를 숭고한 시선으로 보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모습, 그리고 항상 신중한 것보다 유치한 것을, 또한 생산적인 것보다 요점없는 것을 선호하는 모습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코믹하고도 비참한 자신의 이미지의 끝없는 퍼레이드가 주는 자기-회의감 속에서도 당돌함을 유지했습니다. 그의 서툴고 불량한 탁월함을 이해하기 위해 회화나 초상화는 물론,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가 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작업들은 그의 작업이 구제불능의 위기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의 그런 쓰레기같은 퀄리티의 작업들이 키퍼Kiefer나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같은 독일의 늙은 신표현주의자들의 진영과 대위counterpoint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Marcus Verhagen, revised and retitled text orginally published as 'Trash Talking: How Martin Kippenberger Found Success in Failure', Modern Painters (February 2006) 6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