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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Wilson「Just Pathetic」(2004)

by AKHWEE 2013. 10. 28.

 1990년대의 미술사 연대표를 살펴보면, 1960년대 이래로 꾸준히 등장하는 작은 운동들ㅡ'Young British Artists,', 'art post-medium', 'live art', 'context art'ㅡ로서 특징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전개는 갓 시작한 새로운 주자인 'abject/slacker art'에게 무례한 방해를 받는 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호의 저자인 마이클 아처Michael Archer가 쓴 글에 따르면, 그러한 경향은 80년대 말 처음 드러났었고 1996년 쯤 시들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것의 껄렁한 정서적 영향력은 여전히 느껴지고 있습니다. 팝의 핵심적인 문법을 변형하지 않은 채 쉐비식Shabby-chic한 변형을 줌으로써, 아브젝트 아트는 (적어도 예술계에서) <American Psycho>에서 보이는 1980년대의 출세지상주의가 <Clerks>(1994)에서의 케빈 스미스Kevin Smith의 싫증난 게흐름으로 이행되었음을을 보여줍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배설 충동에 대한 그의 책<공포의 권력Power of Horror: An Essay on Abjection(영어로 처음 번역된 것은 1982년임)>에서 '아브젝트 아트'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옳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큐레이터 겸 운동-제작가movement-maker인 랄프 루고프Ralph Rugoff는 '크리스테바야말로 아브젝트에 관심을 가진 가장 중요한 비평가이자 큐레이터'라고 하며 이를 공식화해주었습니다. 그의 전시인 <Just Pathetic>에서 그는 '조르주 바탈리Georges Bataille야말로 진정 애처로운pathetic한 영혼에 근접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또한 보들레르Baudelaire의 개념인 '악마의 웃음satanic laughter'를 포함한 웃음의 기원에 대한 철학사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물론 아카데믹한 전문가들을 차용한 이러한 이론적 설명이 난잡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말입니다. 데니스 홀리어Denis Hollier는 10월 호를 통해 성질을 부렸습니다. 독립적인 스터디 프로그램의 동료였던 크레이그 하우저Craig Houser, 레슬리 C. 존스Leslie C.Jones와 사이먼 테일러Simon Taylor가 휘트니 뮤지엄에서 1993년에 열었던 전시 <Abject Art>에 대해 그는 아래와 같이 불평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abject라는 거지? 모든 것들은 아주 완벽하게, 분명하게 예술작품들이야. 그들은 승자의 편에 있을 뿐이라고"

 그 시절의 끝에서, 아브젝트 아트의 겹쳐진 영역에서 3개의 전시가 계획되었습니다. 구로프의 <Just Pathetic>은 LA의 Rosamund Felsen에서 열렸고, 이와 함께, Andrea Rosen 갤러리에서는 <Work in Progress? Work?>가, 뉴욕의 Stux에서는 빅 뮤니즈Vik Muniz의 <Stuttering>이 열렸습니다. 이 셋은 모두 1990년에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몇 안되는 예술가들이 소개됬었는데 그 예술가들은 반-운동주의의 핵심적인 작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루고프의 전시에서는 마이크 켈리Mike Kelley와 캐디 놀랜드Cady Noland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Mike Kelley, More Love Hours Than Can Ever Be Repaid and The Wages of Sin, 1987. Stuffed fabric toys and afghans on canvas with dried corn; wax candles on wood and metal base, 228.6 × 302.9 × 12.7 cm, overall plus candles and base.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그러는 동안 뮤니즈의 전시에선 카렌 킬림닉Karen Kilimnik과 카리 레이보비츠Cary Leibowitz가 주인공이 되었고, 


Cary Leibowitz, Kick Me (Burgundy Pants), 1990.


그리고 로젠에서는 28세의 션 랜더스Sean Landers가 주도면밀한 자기비하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모리세이Morrissey가 그랬던 것처럼, 랜더스의 중년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Sean Landers, Fart, 1993, Oil on linen, 213.4 x 285.8 cm.


1992년 런던의 ICA에서의<True Stories>나 휘트니의 <Abject Art>에는 분명 더욱 확실한 비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상한 삼총사는 그 기대와는 다른 저렴한 풍조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1992년 Artforum 9월호의 'The Loser Thing'에서 실시한 한 경향의 조사에서, 론다 라이버만Rhonda Lieoberman은 "abjection"을 '폐기되고, 존재 했었거나 낮은 지위로 사임하는 ㅡ마치 정신병적으로 스스로를 이상적으로 잘못 인식해서 자기 자신을 버리는ㅡ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술집에서 고기를 주문하기에도 부족한 영어 실력을 가진 주제에 러스킨Ruskin의 미술사적 글을 번역하려 했었던)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와 ('거장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와 똑같은 사이즈의 신발을 신고서 발이 붓도록 걸어다녔었던)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행동을 인용하여, 그녀는 그들의 이러한 고급 오마주 행위 '합법적인 아브젝트'로 규정하고, 그들을 애처로운pathetic한 태도의 자손들의 조상으로 특징지었습니다. 레이보비츠, 랜더스 그 밖의 나머지들은 그들 이전 세대의 장인들이 만든 현대의 겉반 번드르르한 비평을 가혹한 안도감에 던져버림으로써 그들의 부적합을 예술로서 번역해버리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전시를 소개하면서, 루고프는 ''pathetic'해지는 것은 루저가 되는 것, 불행하게도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분류학에 의해 pathetic이란 범주에 포함된 것들은 '실패를 그것의 재료'로 사용하는 예술이었습니다. 그가 말했듯이 이는 몇몇 방법으로써 그러고 있었습니다. 첫째, 그것은 저속한 미학과 낡은 재료들을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은유하거나 시적이 되어 위엄이 생기는 것을 예리하게 피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이들은 인정받는 예술 제작의 형태로부터 방향을 틀어서 스쿨버스 뒤편에서나 더 자주 경험할 수 있는 기본적인 코미디식 어법을 선택했습니다. 끝으로, 그들은 그 스스로를 미술사와 나란히 놓는 것을 적게나마, 혹은 아예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수명이 짧은 것을 선호했고 방어적으로 현재와 연계했습니다. 안그랬다면 그건 아마 재미없었겠지요.

 마이크 켈레이의 작업들은 <Just pathetic>에서 제 몫을 해냈습니다. 켈레이는 이미 그의 동네의 중고 할인점이나 마당 장터가 열리는 곳이라면 항상 가있었습니다. 루고프의 전시에 등장했던ㅡ찢긴 인형들, 더러운 양말들, 축쳐진 아기 담요들, 그리고 변색된 강아지 접시 등ㅡ 애잔한 콜랙션들은 이들에겐 떨어지는 것 외에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은 고양이 한쌍에 헌정한 3자로된 기념비<Storehouse, Mooner and Ougi, (모두 1990년)>을 통해 켈레이는 감정적인 도피와 문화적 부적응에 대해 분명하게(그러나 가까스로) 얘기합니다. 갤러리를 웃어넘겨야만 했었던 '칼과 금' 바로 이전 시대에 대해 말입니다. 동일한 키치한 기원을 공유하고 있는 ㅡ근사하고 에로틱한ㅡ 제프 쿤스Jeff Koons의 <Rabbit>(1986)이란 작품과는 달리, 켈레이의 생쥐들은 낡아 보이고 학대당해 보이고, 전혀 회복가능성이 없어 보이기조차 합니다.



Michael Wilson, 'Just Pathetic', Artforum (October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