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ords/translated

Emma Dexter「Authenticity and Forgery: Luc Tuymans」(2004)

by AKHWEE 2013. 11. 20.

Luc Tuymans, Still Life, 2002, Oil on Canvas, 347 x 500cm.


뤽 튀망Luc Tuymans의 작업을 보면, 그가 존경하는 엘 그레코El Greo나 벨라스퀘즈Velázques, 레옹 스피리에르Léon Spilliaert, 심지어 마그리트Magritte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명백한 차가움"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튀망은 이런 가치를 무관심이라고 묘사했고[각주:1] 이 차가움을 다양한 방식으로서 성취해냈습니다. 가장 확실하게는 이미지 창작을 위한 건설적인 도구로서 사진에 의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일일작이라는 엄밀하게 제한된 시간 내에 그림을 그려내었습니다. 튀망은 실제 대상이 아닌 그것의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더니스트들이 금기시 했던 ㅡ단순히 재현을 묘사하는 것으로서의ㅡ 묘사를 극복할 수 있었죠)

이런 지시하지 간접적인 화법은 주제를 그리는 것보다 부수적인 것들을 표현 함으로써 지속되었습니. 그리고 실물로서의 모델, 인형, 마네킹 혹은 다른 사람들의 그림들 같은 것들을 대체물로서 대체해 표현함으로써 말입니다. 심지어 무수히 많은 정물화도 대체물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911 테러에 대한 반응으로서 그가 확실하게 비어있는 그림을 만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주제에 대해 묘사하는 것이 아직은 금기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튀망은 오직 그림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호함을 즐겼습니. 우리가 보는 것은 진짜 사람을 그린 그림일까, 아니면 사진을 그린 그림일까, 아니면 그 사람을 묘사한 것을 그린 그림일까? 그림엔 힘이 있을까, 아니면 단순한 어떤 다듬어진 자기-참조적인 허풍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일까? <Animation>(2002) <Blessing>(1996)같은 작품처럼, TV나 영화의 이미지를 뿌옇게, 구분이 안되고 모호하게 그린 그림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알지 못하게 만듭니다


Luc Tuymans, Animation, 2002, oil on canvas, 174 x 250cm.


Luc Tuymans, Blessing, 1996, Oil on Canvas, 143 x 187 cm.


뭔가 부족한 튀망 그림은 그 지점에서 힘을 갖습니다. 그것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써 그것은 무리없이 지시icon나 문맥, 혹은 상징 사이의 역할을 왔다갔다 합니다. 비평가들과 큐레이터 스테판 베르그Stephen Berg는 튀망의 시도들을 아주 유연한 기호학적인 특징을 지닌 것(having a profoundly boneless semiotic)으로서 설명합니다.[각주:2] 이러한 간접적인 화법의 작업은 튀망으로 하여금 어떠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의 회화 비평의 다양한 비평들을 확실하게 보류하도록 만듭니다

화가로서의 튀망의 경력은 회화에서 더이상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데에서 그 최초의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진실된 가짜'라는 모순된 개념을 창조해냅니다.[각주:3] 이것은 영민하게 튀망의 두가지 역할을 동시에 요약해 보여줍니다. 회화의 시도와 연관되는 것, 그러나 동시에 회화에서 버려진 것이 '때늦은' 특성들을 이해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용어는 아마추어나 브루주아의 자기-인식과 관련된 형식적이며 입증 안 된 언어 그림을 그리는 행위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 줍니다. 비평가들은 심지어 튀망이 기술적이고 스타일리스틱하게 '위조'된 그림들을 만드는 것 까지 보았습니다. 그는 마치 (<Gaskaer>(1986)에서 처럼페인트나 (<Body>(1990)에서 처럼) 특정한 크랙들로 그려진 것들이, 세월의 얼룩이 묻은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이는 명백히 빛바랜 색을 띠어서, 제작된 때 보다 더 오래된 그림같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Luc Tuymans, Gaskamer (Gas Chamber), 1986, oil on canvas, 61 x 82.5 cm.


Luc Tuymans, Body, 1990. Oil on canvas, 48.9 x 34.9 cm.


튀망은 그의 시도들을 기억을 그린 그림이라고 말해왔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그림이 '시작보다 오래되어 보이는 그림'이길 바랬습니다.[각주:4] 주목할만한 다른 작품인 <Petrus & Paulus>(1998)과 아래에서 언급할 <Passion>시리즈에서는 악명 높은 네달란드의 위조가인 Hans Van Meegeren (1899-1947)의 스타일을 구사해버렸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가짜'의 '가짜'를 보게 되어 버리는 것이죠. 리히터Richter가 그만의 '2차적 구상주의의 전략Second order representational strategy'[각주:5]를 통해 포토리얼리즘과 추상, 제스쳐들 사이를 연관시키며 진동하는 동안, 튀망의 그림들은 훨씬 더 다층적이고 모호하게 되고 있었습니다


Luc Tuymans, Petrus & Paulus, 1998, oil on canvas, 118 x 86 cm.


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울리히 루크Ulrich Loock에 따르면, 튀망이 그림으로써 남긴 알리바이는 단지 재현의 재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어색함이나, 대충 그림아마츄어스러움과 고의로 의도된 허접함 같은 것들은 어떤 면에선 뚜렷하거나 개념적으로 풍요로운 특징들을 보여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각주:6] '진실된 가짜'란 개념에 포함되어 버리는 것은 기억이란 개념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각주:7] 진실된 가짜는 기억이란 언제나 파편적인 까닭에, 그 기억의 실패를 풍자적으로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현실을 대체해버린 실패한 경험이나 일종의 위조품을 만들어냄으로써 실로 기만적인 무엇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실패한 기억이란 까먹은 것들을 다시 기억해내는 행위와는 아주 다릅니다. 튀망이 한 것은 기억하는 행위를 다시 창조해내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초기작인 <La Correspondance>(1985)는 문학적이고 비유적인 수준에서 기억의 행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Luc Tuymans, La Correspondance, 1985, Oil on canvas, 80 x 120 cm.


<La Correspondance>(1985)는 네달란드 작가인 J, Van Oudshoorn(1876-1951)이 부인에게 보냈던 수많은 엽서 중 하나에 그린 그림입니다. 그것은 그가 긴 시간 동안 집을 떠나 타지에서 지내며 매일 같은 식당에서 먹었던 점심 식사를 기록하여 부인께 보냈었던 엽서였습니다[각주:8]. 그 이미지는 추억과 향수병의 나타낸 것이었습니. 한편 장식적인 모티프로 겹쳐진 화면을 추가함으로써 현재와 과거 사이에 있는 장막처럼 상징적으로 작용하게 했습니다. 예수의 수난을 묘사한 그림 연작 -예를 들어 <Christ>(1999) <Petrus & Paulus and Judas(1999)-도 또한 독일의 Oberammergau(역자 주: 오벨암메르가우- 독일 남부, Munich(뮌헨) 서남쪽에 있는 마을; 10년마다 상연되는 그리스도 수난극으로 유명(네이버))에서 했던 수난극의 공연의 진짜 그림의 기억을 재현한 것이었습니

Luc Tuymans, Christ, 1998, oil on canvas, 311 x 147cm.


이는 악명높은 위조가 스타일의 언어를 빌려와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그 공연은 자기 스스로를 세련되고 의식화한 기억의 재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반-유대주의와 나치와 연관됨으로써 더럽혀져 있기도 했습니다(아이러니하게 다하우Dachu 강제수용소와 그리 멀지 않은사회주의 국가의 시대 동안 방해없이 이러한 종교적인 생산들이 계속되어 온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1934년에 히틀러를 방문했고 그들의 반 유대와 로마인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을 지지하기도 했었습니다. 튀망은 오벨암메르가우에서의 이미지들을 사용해 특정하게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크리스찬의 무관심/책임감의 망령을 일으켜냈습니. 그리고 중세시대 때부터 수행되어 왔고 나치가 즐겨 사용했었던 유대인의 잘못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신화를 드러냈습니다. 그런 문제 속으로 스스로를 녹여들이고 있는 이 그림들에서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것은 역사의 얇은 장막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신화와 위조품 그리고 프로파간다로 만들어진 팰럼세스트Palimsest(원래의 글 일부 또는 전체를 지우고 다시 쓴 고대 문서- 네이버)의 장막이었습니다. 튀망은 이 이미지들을 아주 많은 '속임수'들과 '이중의 속임수(여기서 두 번 속은 상대방은 진실을 거짓말로서 받아들이게 된다.)'를 겹쳐놓음으로써 그림의 진정한 주제가 안보이게 하였습니다

 루크Loock는 튀망의 그림들은 그것의 사물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기억에 대한 우화라고 지적했습니다. 튀망의 시선은 멜랑꼴리하게 빈 방과 고독한 사물에 대해 사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간의 연관성의 부재는 명백하게 묘사됩니.[각주:9] 루크는 재현에 대한 모든 질문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튀망의 그러한 방식을 계속 언급합니다. 튀망은 영화적인 우발성과 미학적인 위장술, 글쓰기 그리고 환유법의 실패를 사용함으로써 이미지들을 약화시키고 그것의 결핍으로부터 풍자의 우화를 만들어낸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패가 연속적으로 재생산되면서, 그리고 이 실패로서, 이 위장술로서의 그림은 그가 재현해낼 수 없었던 것들까지 묘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예를들어 홀로코스트말입니다.

 우리는 튀망의 모든 작품들을 기억의 행위로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작업의 부수적이고 왜곡되거나 중요하고 집단적인 것으로부터의 도망치는 방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이러한 비전통적이며 그만의 대단히 중요한 방식으로써 말미암아 각 그림들은 기억의 공간이 됩니다. 그리고 그의 캔버스 사이의 비어있는 공간들엔 그가 그림엔 그려넣지 않았던 세상 모든 것들을 담겨지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망각의 공간 또한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면에서 이는 카프카의 유사성도 언급해볼만 할 것 같습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The Trial>(1925)에서 지적합니다. 카프카는 다른 사람들은 당황할만한 것들에 대해서도 이미 그런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무덤덤하게 얘기합니다. 바로 '이것은 전달될만한 새로운 것이 없고, 영웅을 단지 그가 뭔가를 까먹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회상의 공간으로 미묘하게 초대하는 것입니다.'[각주:10] 아마 이 설명은 튀망의 그림들을 볼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도 일치할 것입니다. 프카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상하고 왜곡된 디테일들은 기만적으로 평범한 일이라 여겨지는 것들에 대비해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알았었던 것만 같았던 것들을 밝혀내고 다시 기억해내지만 다시 잊어버리고 또 다시 밝혀내려는 느낌 또한 항상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그림의 기능과 같습니다. 홀로코스트, 예수의 수난, 제국주의의 야만성, 이 모든 것들은 튀망의 일상적인 시선 속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돌아와 우리를 괴롭히게 되는 것이죠. 카프카가 예측했던 것들을 튀망은 기록해냈습니다. <Die Zeit>시리즈에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를 그린 그림을 보면,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깜깜한 안경 표면 위에서 그 두가지가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Luc Tuymans, Time, 1988, oil on cardboard.


벤야민은 '망각이란, 카프카의 이야기가 빛을 향해 밀어붙혔던 무궁무진하고하고 중간의 세상에서 온 상자이다'라고 덧붙혔습니다.[각주:11] 여기서 '무궁무진한 세상'이라는 말은 그림에 시선들이 누적되어 나타나는 튀망의 특징들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

 

 

Emma Dexter, extract from 'The Interconnectedness of All Things: Between History, Still Life and the Uncanny', in Emma Dexter and Julian Heynen, Luc Tuymans (London: Tate Publishing, 2004). Reproduced by Permission of Tate Trustees.


뤽 튀망의 작품이 진짜 이렇게 보이냐고 나한테 묻지는 마시오.. 그리고 저 가스실그림은 노충현 작가의 그림에 확실히 엄청나고 대단하게 큰 영향을 주었음에 명백히 분명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



  1. [footnote 14 in source] ''Juan Vincente Aliaga in Conversation with Luc Tuymans', in Ulruch Loock, Juan Vincente Aliaga, Nancy Spector, Hans Rudolf Reust, Luc Tuymans {London and New York: Ohaidon Press, 2003) 15 [본문으로]
  2. [15] Stephan Berg, 'Twilight of the Images', The Arena (Kunstverein Hannover, 2003) 11 [본문으로]
  3. [16] 'Juan Vincente Aliaga in COnversation with Luc Tuymans', in Loock, et al., Luc Tuymans, op. cit., 8. [본문으로]
  4. [17] Ibid. [본문으로]
  5. [18] David Greem, 'From History painting to the History of Painting and Back Again: Reflection on the work of Gerhard Richter', in David Green and Peter Seddon, eds, History Painting Reassessed: The Representation of History in Contemporary Art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0) 33. [본문으로]
  6. [19] Loock, et al., Luc Tuymans, op. cit., 37-8. [본문으로]
  7. [20] Ibid., 44. [본문으로]
  8. [21] Luc Tuymans, 'Disenchantment' (1991), in ibid., 118. [본문으로]
  9. [22] Loock, 'On Layers of Sign-relations, in the Light of Mechanically Reproduced Pictures, from Ten Years of Exhibitions', in Loock, et al., Luc Tuymans, op. cit., 56-7. [본문으로]
  10. [23] Walter Benjamin, 'Franz Kafla' (1934), in Walter Benjamin: Selected Writings, Volume 2: 1927-1934 (Cambridge, Massachusetts: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809. [본문으로]
  11. [24] Ibid., 81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