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ords/written

예술이란 이름의 노동

by AKHWEE 2014. 1. 23.

http://ewsngod.nayana.kr/zexe/mainissue/4063


 홍태림씨의 평론. <공장미술제> 그 자체를 깠다에서 끝나기보단, 이 생태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확장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댓글을 보면 디렉터가 직접 장문의 해명(or 변명)글도 올려놨다. 이 글을 읽고 보통 속상하지 않았던 모양. 서진석 디렉터님 뿐만 아니라도 누군가에겐 신발 속에 들어 있는 돌맹이 같은 글일 수 있겠다. ㅕㅃ님의 댓글이 인상적이다. "여섯번째에서 말하는 외국인이 영국 운운한건 뭐 어쩌란 건지.. 실험적인 전시였고 대호평이었으면 작가들은 흐뭇~ 하게 있으면 된다는 겁니까? 그래서 기분이 괜찮으신가요? 공짜로 전시한 수많은 작업들로 기획력을 인정받고 큰 사업을 펼쳐낸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던가요?" 여기다 작가들은 이렇게 항변할 수밖에 있을 것이다. "이 착취는 저 디렉터가 강요한게 아니라 나의 자유의지요"라거나 "어쩔 수 없잖아". 이런 궁핍한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표출되면 이런 것이 나오게 된다. 그 이름도 거룩한, "예술인복지법". 링크 이 기사 댓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변태적인 상상력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예술계를 보며 발견할 수 있는 대부분의 '과잉'은 어쩌면 '결핍'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사실 제도권이니 주류니 해봤자 그렇게 대단하신 조직인 '미술계'가, 정작 외부에서의 충격 따위엔 아주 예민하게 휘청거리는 꼴을 보자면 감히 예술이란 이름조차 붙여주기 아쉬운 경우가 많다. 작가를 위한 전시인지, 전시를 위한 작가인지, 무엇을 위한 무엇인지가 명확하지 않거나 뭔가 괴상한 일이 펼쳐질 때,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제살 뜯어먹으며 연명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이니 곁불은 쬐지 않는다던 유전자가 남아서 제살을 뜯을 때에도 게걸스럽진 않고 고상한 방식으로 그 맛을 음미하는 기품을 보여준다. 이쯤되면 병림픽이라 불러도 전혀 아깝지 않다. 전태일의 전기를 다룬 영화를 만들면서 스탭들이 노동법을 어겨야만 하는 꼴이랑도 똑같다.
 인간에게 중요한건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말의 무게일진데, 몇몇 예술가란 사람들 조차 이 둘을 혼동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물론 목소리를 낼 기회를 잡는 것은 중요하다. 그만큼 치열하다. 또한 그만큼 미쳐야 할 것이고, 그만큼 병신되기도 십상일 것이다. 어지간히 빈약한 이 시스템은 모든 예술가 지망생들을 수용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목소리로 어떤 이야기를 할텐가에 대한 태도이다. 작가의 권리를 둘러싼 문제는 사실 예술가나 작가로서의 자존심의 문제까지 나아갈 것도 없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대접 조차 받지 못하면서 얻어내는 전시 경력 한 줄의 가치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것이 예술가로서의 삶이나 인간으로서의 삶, 그 무엇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그 빈약한 제도 속으로 굳이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모두가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산속에 짱박혀서 텃밭 가꾸며 작업만 하는 예술가가 더 세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은 최소한 자기가 안고 있는 모순을 붙들고 평생 씨름할 줄 안다. 그런 작은 시도들이 주변으로 확대될 수만 있다면, 이는 어떤 문제를 해결할 단초가 될 가능성이 있다. 예술가는 문제를 제시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었던(지금도 알 수 없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끝나면서 끝났어야 했다. 우리는 그 문제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똑똑할 수 있다. "Those who do not move do not notice their chains." 로자 룩셈베르크의 말이다. 

'너도 북어잖아'하면서 나에게도 이런 문제에 대해 발언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 많이 있을 것이다. 열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내가 어려서 너무 모른다고 꼰대질을 해대려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원래 이래"라거나 "너나 잘해" 같은 말들은 자신의 상상력이 메말라있다는 현실을 드러내는 적절한 방법일 뿐, 그러한 현실에 대한 나의 판단을 비판하는 것과는 위상이 다른 문제이다. 내가 "콜라는 맛있어"라고 햇더니 "콜라엔 인산과 설탕, 카페인 등이 들어 있는걸 난 알아"라고 말하는 꼴이다. 뭐 어쩌라는 거냐. 앞서 언급했던 나의 주장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싶다면 내 앞에서 현재 가짜 예술가들의 메마른 상상력을 굳이 다시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러한 현실에 대한 본인의 최소한의 입장을 들고 와야만 한다. 말이나 글이 힘들면 작품으로라도. 심리학계에 길이 남는 재밌는 실험이 있다(링크). 골자는 인간은 제한된 자원을 놓고 싸우게 되고, 싸우기 위하여 차별을 하고, 차별하기 위해서 차이를 발견해내려 애쓴다는 것이다. 아무튼 "원래 그래"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한 이야기인 나머지 거북하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