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목소리의 크기 보다 말의 무게가 더 중요하단 생각을 자주 한다. 작업실 안이나 산 속에 짱박혀 작업만 하는 작가들이 차라리 세상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그다지 평소의 나답지 않은(?) 얘기를 하기도 했다. 솔직히 이런 얘기들은 큰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말에 무게가 실리지 않을까가 두려운 자기비판에 가깝다. 김영건 선생님께서 아래 글을 통해 지적하셨듯 그런 경솔함이 가져올 '파괴적 결론'이 두렵기 때문이다.
(http://agora.co.kr/100204639315)
어제 밤 안씨막걸리에서 걸어 나오며 윤수영이랑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일수록 타인에겐 관대해지기 힘든 것 같다는 내용의 대화를 했다. 나의 환경과 기준의 형태가 뚜렷할수록 다른 타인의 뭔가 모호한 환경이나 기준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대화의 골자다. 대화는 내가 택시를 탐으로써 중단되었는데, '어쨌든 어렵네' 이 것이 아직까지의 내 결론이었다.
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인간의 기획 중 어떠한 예술을 비롯한 이런저런 분야들은 낯선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역으로는 타인이 나의 삶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열정적으로 제안해 왔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외로운지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시도가 계속 되는 까닭은 거기에 답이 없(었)기 때문일테다. 어쩌면 답을 찾는 과정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문제 해결을 위한 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누군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그러한 간접적 경험 마저도 힘들다고 말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타인의 삶을 대신 생각해줄 누군가가 나타나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영건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인문학 공급자'들이 나타난 까닭도 그러한 요구와 무관하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는 강 뭐시기 같은 선생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큰 환영받으셨던 만큼 심한 반발에 부딪치고 있기도 하다.
내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식의 태도나, 언제든지 틀릴 수 있기 때문에 틀리지 않기 위해선 가마니처럼 가만히 있어야 겠다는 식의 태도는 쿨한 개방성이 아닌 실천이 거세당한 인식의 빈곤을 상징할 뿐이었다. 삶에 과정에서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을 뺀 나머지 인생은 선택으로 이뤄져 있다고 눈매가 예사롭지 않은 누군가가 말하기도 했었다. 그의 말마따나 선택이란 것의 비중이 그렇게 큰 것 이라면, 그 선택과 판단을 내리게 하는 준거 역시 비중이 클테다. 쉽게 말해 그 준거를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겠다. 어쨌든,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우리는 누군가의 준거를 차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여유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의사 결정도 선거를 통해 뽑힌 대표가 대신 해준다. 어쨌든 준거를 제시할 권한을 위임받은 그들 중 어떤 선생님은 우리 시대가 처한 어떤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냉장고를 없애야 한다는 놀라운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기준을 통해 내린 나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경우, 그것에 대한 책임은 누구한테 있는 것일까? 그 기준을 선택한 나한테 있는 것일까, 잘못된 기준을 제안한 사람한테 있는 것일까? 상한 음식을 사먹고 탈이 나면 먹은 사람한테 잘못이 있는가, 상한걸 판 사람한테 잘못이 있는가? 어떠한 기준의 옳고 그름을 검증하는 것엔 또다른 기준이 필요할 것이고,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겐 그러한 기준을 판단할 기준을 판단할 기준을 판단할 기준을 판단할 기준을 (x ∞....) 제시할만한 여유 또한 절대적으로 부족하단 것 쯤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런 작업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학자 등--이 이미 그런 일을 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들은 괜히 있는게 아니었다. 이런 정황 상 위의 문제에 대해선 기준을 제공한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이 따른다고 본다. 신뢰는 분업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므로, 식료품 판매자는 식료품 판매자가 아닌 다른 삶의 부분들을 보장받기 위해 음식 관리를 잘해야만 한다.
따라서 미래의 나를 비롯해 어떠한 기준들을 제시하고자하는 야망이 있는 사람이나, K모 선생처럼 이미 영향력있는 어떠한 기준을 제공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지금 당장 시대적 사명이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조급함을 버리고 타인이나 스스로의 요구로부터 비판적인 거리를 갖는 여유가 필요할 것이다. 다른 이들이 여유를 포기한 댓가로 그들이 가진 것이 바로 여유이고, 그 여유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식이 바로 끊임없이 판단을 위한 기존의 기준을 비판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천리길도 한걸음 부터라고 내 안팎의 여러 요구를 수용하고 그러한 기대에 책임을 지는 것의 시작은 나만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로부터, 나아가 내 주변으로부터의 진보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으면서 목에 힘을 주고 보는 것으론 저들이나 그들의 삶에 영향을 줄 어떠한 설득력도 얻을 순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내가 속세를 떠난 예술가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부분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온 삶을 바쳐 전력으로 스스로의 모순과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타인를 문제에 발언할 수 있는 가능성도 갖고 있다. 이는 그가 개입할 문제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에 따라 달렸다. 하지만 그 언젠가가 도대체 언제냐며 실력양성운동을 비판하듯 그들을 비판할 수 있다. 내가 속세를 떠난 사람들이 차라리 낫다는 이유는 목소리만 큰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가 옳고 선하단 이유로 그 행위나 작업의 무능함과 무기력함을 정당화하는 자위 중독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들보단 차라리 저들이 낫다. 하지만 저들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 또한 결코 아니다. 우리에겐 그 두 성향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여유를 활용하는 법이고, 서로에게 진 빚을 갚는 법이며, 그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렇게 갈망해왔던 소통의 시작과 다름아닐 것이다.
※ 물론 나의 기준을 타인에게 제시하고 적용시키는 것이 '내가 옳다'를 강요하는 꼰대질을 위한 오지랖이 아니라 저마다의 옳음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다(라고 말하면서 이미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은 일들도 지향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커다란 계획을 위한 유의미한 한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란 점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면서 지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