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콘, <래디컬 스페이스>, pp. 230-4.
'지방자치주의'는 파시즘 이전 시기에서 시작되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재등장한 지방정부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이론적으로 정교화된 개념이다. 그것은 교육과 치안, 구직, 문화, 서비스를 비롯하여 시민들에게 곧바로 영향을 미치는 쟁점들과 관련된 일상생활의 정치이다. 지방자치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정치적 접근법이다. 이는 정치적 균열이 귀속 지위나 전통적인 위계 관계가 아니라 상충하는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뜻한다. 지방자치주의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노동회의소 같은 결사들에 참여함으로써 시민이 통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기성의 여러 제도 자체가 배타적이고(이거나) 엘리트주의적이라면, 단순히 이해관계를 대표한다고 해서 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는 지방자치체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는 노동조합 같은 결사체들과 대안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민중회관 같은 정치 공간들을 확보해 나가는 것임을 뜻한다.
얼핏 보면 지방자치주의의 개념은 공동체주의와 유사한 것 같다. 둘다 지방색과 연대성을 강조한다. 두 가지 접근법은 공히 정치가 개인적 이해관계의 집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지방자치주의는 공동체주의의 전통적인 이해 방식과 구별된다. 심지어 어떤 점에서는 반대되기까지 한다. '지방자치주의'(municipalism)라는 이 새로운 학술 용어는 '자유로운 도시'를 뜻하는 라틴어 '무니키팔리스'(municipalis)에서 비롯되었고 '무니켑스'(municeps)또는 '특권을 지닌 시민'이라는 용어를 거쳤다. 그것은 도시를 유기체적 실체로서가 아니라 정치 공간으로서 강조한다. 지방자치주의에 고유한 지방주의(localism)는 바깥세상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지방적 이해관계와 연방 구조, 국제적 맥락을 중재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지방자치체는 공유된 물리적 세계에 의해 하나로 역인 시민들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공유된 세계란 그저 수동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실천을 통해 능동적으로 창조된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바로 '지방자치주의'라는 용어에 함의되어 있는데, 그런 점에서 지방자치주의는 자연적이거나 신화적인 기원이 아니라 정치 행동을 통해 구성된 독자적인 영역을 가리킨다.
'공동체주의'라는 용어가 안고 있는 문제는, 공동체를 이론화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을 뭉뚱그려 지칭한다는 데 있다. 그런 다양한 방법 가운데에는 지금 말하고 있는 지방자치주의를 비롯해 공동체 분파주의(communalism)와 결사(association), 호모노이아(homonoia) 등이 있다, 공동체 분파주의는 페르디난트 퇴니스(Ferdinard Toennies)가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라고 부른 것과 유사하다. 즉 그것은 특정한 지방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한 유기체적인 유대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구성체는 비평가들이 공동체주의가 개별성과 진보를 가로막는다고 비판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한 사회성의 양식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퇴니스는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Gesellschaft)를 나란히 제시했다. 공동체의 또 다른 형태인 결사는 의도적인 선택의 산물이다. 그것은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기로 선택한 자율적인 개인들의 집합이다. 내가 '호모노이아'로 부른 세 번째 가능성은 서로 마음이 일치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공동체 분파주의와는 달리 호모노이아는 공유된 역사를 통해 창출된 유기체적 통일성을 가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통일성이 정치적 기획을 통해 창출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정치적 기획은 일종의 위장술이다. 호모노이아는 인위적으로 구성되었음을 강조하기보다는 정교한 태초 신화들과 공유된 문화의 의례화된 재구성을 통해 통일성을 창출한다. 이러한 대안의 전형적인 사례가 루소의 《폴란드 정부에 대하여》에서 잘 나타난다. 1
자유주의자들과 공동체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에서 이 세 가지 사회성 양식의 강점가 약점이 지속적으로 언급된다. 탈구조주의 비평가들에 따르면, 공동체 분파주의는 현실의 정치적 구성체가 아니라 상상된 과거에 대한 향수 어린 욕망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가능성이기는 하지만, 호모노이아의 결함을 공유한다. 마음이 맞는 상태는 올바른 개인적·집단적 판단을 내리는 데 필수적인 이견을 애초부터 배제할 위험이 크다. 그것은 또한 인간의 번영을 추구하는 수많은 전망의 필수 구성요소인 개별성과 창조성을 위한 조건을 제공하지도 못할 것이다. 통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획일성이나 배타성에 경도되기 쉽다. 그렇다고 결사가 반드시 유력한 대안은 아니다. 집단적 행위를 순수하게 도구주의적인 견지에서 보면, 무임승차와 간련된 일체의 문제를 숨기기 어렵다. 즉 그러한 결사가 장기적 또는 변혁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헌신성을 계속 촉발할 수 있는지는 의심쩍다. 결사에 깃들인 도구주의적 성향 탓에 자원이 없는 사람들을 포함시킬 동기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사는 이질적인 집단들의 사회 통합을 위한 메커니즘으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결사 또는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이 '도구적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을 공동체 분파주의와 구별하는 한 가지 요소는 개인에 대한 독특한 이해 방식이다. 즉 "사회적 연합의 이념"은 "행위 주체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할 동기를 갖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습적인 개인주의적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반면에 공동체 분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당순히 감정과 열망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인)이 어느 정도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말하자면 공동체가 하나의 자아(the self)를 구성한다는 말이다. 물론 중요한 유보 조항은 바로 '어느 정도'라는 표현이다. 공동체주의자들과 탈구조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논쟁은 주체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갈등에서 자유로운 맥락에 따라 구성되는가(혹은 구성되어야 하는가), 또는 주체가 복수의 주체나 상반되는 주체와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가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지방자치주의 또한 (상호) 주체성에 대한 특징적인 이해 방식을 갖고 있다. 지방자치주의에 따르면, 주체는 경제적·사회적·심리적 힘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구성된다. 정치 그 자체도 주체를 구성한다.
지방자치주의는 갈등을 중재하는 대단히 정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양식이다. 그것은 공동체가 정치를 통해 구성되고 근접성에 의해 강화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근접성이란 사람들이 서로의 곁에서 생활하고 일하면 자연히 상호 의존적인 이해관계와 공유된 경험을 통해 결합되리라는 것을 뜻한다. 갈등조차도, 최소한 갈등을 해결하는 공유된 맥락만 있다면 시민들을 한데 엮어 주는 하나의 경험이다. 지방자치주의는 두 가지 중재 양식, 즉 단체 협상(지방 차원의 담합주의)과 선거 경쟁 사이를 오간다. 담합주의의 기능을 통해서는 이해관계나 혈연으로 구성된 다양한 집단들을 한데 엮어 준다. 또한 선거 경쟁의 기능을 통해서는 지방적 이해관계들을 중재하는 대안적인 틀이 나타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음을 보장한다. 선거 경쟁은 단체 협상의 원리들이 세력균형이나 규범적 목표가 변하면 그에 따라 수정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지방자치주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특수한 전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전망을 논의하고 적용하며 수정하는 포괄적인 토론의 장이다. 그것은 시민이 "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식하고 배타적인 방식이 아니라 통합적이고도 포괄적인 방식으로 사유해야만 하는" 영역이다. 지방자치주의는 연대를 지향하는 기성 집단들과 중재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당이나 동맹체들, 그리고 도전자들과 접촉하는 변혁적 능력이 교차하는 지점에 존재한다. 파시즘 이전 시기 이탈리아에서 지방자치주의는 성공적으로 동원된 하위문화였다.
- 호모노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화와 일치, 통일의 여신이다. (...)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호모노이아는 '한마음' 또는 '일심동체'를 뜻한다.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드로스는 외국인 혐오를 뜻하는 제노포비아에 반대되는 호모노이아의 원칙에 따라 제국을 통치하고자 했다. 이러한 어원에서 나타나듯이, 호모노이아는 우애의 공동체를 뜻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