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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한국 미술문화

by AKHWEE 2014. 7. 6.

1980년대 미술문화의 전개 원본 




오광수, 『한국현대미술사』, 열화당, 2000(이하 ‘한’으로 약칭)

오광수, 『시대와 한국미술』, 미진사, 2007(이하 ‘시대’로 약칭)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한국현대예술사대계 ⋁, 시공사, 2005(이하 ‘예’로 약칭)

임지인, 『한국미술에 있어서 리얼리즘 소통 방식의 연구, 전남대 대학원, 2009(이하 ‘한국리얼’로 약칭)

이호진,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대학원, 2008(이하 ‘포스트’로 약칭)

린다 노클린, 권원순 역『리얼리즘, 미진사, 1986(이하 ‘리얼’로 약칭)

서성록, 『한국의 현대미술』, 문예출판사, 1994(이하 ‘한국현대’로 약칭)

김홍희, 『한국 화단과 현대미술』, 눈빛, 2003(이하 ‘한국화단’으로 약칭)

황하연, 『한국 신형상화화와 리얼리티』, 홍익대 대학원, 2007(이하 ‘신형상’으로 약칭)

김복영, 『눈과 정신』, 한길아트, 2006(이하 ‘눈’으로 약칭)

김복영, 『서술로서의 표현의 의지, 1988(이하 ‘서술’로 약칭)

임지민, 『한국미술에 있어서 리얼리즘 소통방식에 관한 연구 : 이종구, 최병수의 작품을 중심으로』, 2009, 8 (이하 ‘소통’으로 약칭)



Ⅱ. 문제제기

1:1980년대의 미술 경향의 구축에 영향을 미친 환경적 요소들은 무엇인가?

2:1980년대 미술계의 전반적인 성향과 흐름은 어떠하였는가?

3:1980년대의 미술 조류들은 무엇이 있으며 태동하게 된 요인과 전개의 과정, 전반적인 성격은 어떠하였는가?



Ⅲ. 본론



1.1980년대 미술문화의 환경적 요소들

(1)1980년대 한국 미술문화의 사회적 동인들

1980년대는 국제적으로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던 연대로 색채지울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는 월남전 이후의 무기력 상태와 아프간 사태를 통해 나타난 힘의 정의의 불균형, 여기에다 끊임없는 핵공포가 가져오는 심리적 긴장상태가 만연되었던 시기였다. 유럽제극이 탈미국적 현상이 다른 한편으로는 가속되면서 문화에 있어 이른바 다원주의이 꽃을 가꾸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여기에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 역시 격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 뒤이은 신군부에 의한 쿠데타 등 숨가쁜 고비를 맞고 있었다. 억압의 민주화의 열망이 엇갈리면서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한,224p)


(2)미술계의 구조적 환경의 변화

1980년대 미술의 변화의 가장 큰 변화는 미술계를 구성하는 인적 자원의 구성 변동과 국제적 교류의 가속화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부터 서울 뿐 아니라 각 지방에 많은 미술 교육관이 증설되었다. 그 전에는 서울에만 모여 있었고 그것도 몇몇 대학에만 미술 계열이 존재했지만, 1970년대엔 서울과 지방의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 미술과가 신설되어 많은 신진들을 길러내었다.(시대, 180p)


그리고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미술인구의 증폭은 기존의 기성세력과 신진세력을 나누는 세대 간의 갈등구조로 표면화 되었다. 1980년대의 문화 현상 가운데 가장 현저하게 목격할 수 있는 제도권과 민중권 이라는 도식은 그 원인이 어떠한 복잡한 내역으로 짜여 져 있던 상관없이 일단은 세대 간의 갈등구조로 먼저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시대, 180p)


그러나 이러한 구성원 간의 변화와 가치간의 충돌은 단지 표면적인 교육기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정치적 성격의 알력다툼이 아닌 급격한 산업화와 사회 변동이 이 시대의 신진세력과 매체의 변화가 사회 내에서 미술이 가지는 인식에 대하여 미친 영향에서 일차적으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선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미와 예술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미술계의 양적 팽창과 질적 분화가 큰 폭으로 이루어졌다. 미술품은 단지 사적 취미의 대상으로서 완상되거나 친교의 징표로서 주고받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언표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혹은 경제적 재화나 교환가치로서 현실적인 힘을 갖는 것이 되었다. 미술관이나 화랑 개설 붐, 미술 전문 잡지와 출판의 정착, 각 일간지와 저널의 미술 관계 지면의 확대, 컬러 TV 방영 등에 힘입어 미술 대중이 획기적으로 팽창했다. 많은 화랑의 개설로 작품 유통이 확대되었다. 신문 • 잡지 등 정기간행물, TV, 인터넷 등 미술문화와 관련된 일련의 매체 환경이 현격하게 달라졌다. 대형 국제전의 개최로 국외 부문이 크게 팽창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학자, 미술사가,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미술 전문 기자 등 미술계 안에 직접 작품 생산자와는 다른 부류의 미술 전문가 집단이 대두되고 미술문화의 매개자나 수용자 집단은 미술계의 주변부가 아닌 중심부에서 또 다른 문화 생산 주체로서 급격히 부상했다.(예, 280p)


특히 국제적 교류의 가속화는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또 다른 중요 변동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제 5공화국 정권은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의 허술함을 미학의 정치화로 무마하고자 하는 시도와 동시에 국내 민심과 국제적 여론에 대한 유화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해외여행 및 유학 자유화, 정권 초기의 개혁 개방 조치나 서울 올림픽 유치 결정, 그리고 이에 따른 아시안게임의 유치는 그 대표적인 예 이다.(예, 281p)


이러한 국제적 교류의 가속화가 가져온 대형 스포츠 행사는 부가적으로 대규모 국제 미술전의 유치와 전람회를 가져왔는데, 국립현대미술관《아시아현대미술전》, 《세계현대회화전》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새롭게 등장한 사설 미술관들 역시 국제적인 미술 교류의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한국 작가들의 해외전시가 본격화 기 시작하였다. 이렇듯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미술이 피식민 의식을 떨치고 세계 미술이 지형도 안에 본격적으로 배치되거나 세계 미술시장 안에서 일정한 위상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이다.(예, 282p)



2.1980년대 미술문화의 경향-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가깝게는 70년대를 풍미한 백색 모노크롬 회화로, 멀게는 1930년대 후반 추상미술과 1950년대 말 앵포르멜 운동으로 대표되는 한국적 모더니즘은 한국적 민족성의 탐구와 조형적 표현 이라는 입장에서는 얼마간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반대로 예술이 실제적인 삶과 멀어지고 관념화 되어 예술계가 엘리트주의적 성향으로 치우치게 되는 발단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형상성의 복권과 강렬한 정치성의 표현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반동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20년에 가까운 유신독재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저격으로 일단락 된 후, 민주주의 도래를 기대하였던 시민사회에 있어서 전두환의 12.12 사태와 이후 이어지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무참히 가해진 폭력은 더 이상 미술의 관심을 형이상학적 관념의 세계에서 머무를 수 없게 만들었다.


온갖 서사나 발언을 무화시키며 백색을 하나의 ‘빛깔 이상이 것’, ‘하나의 정신’, ‘우주’, ‘스스로를 구현하는 모든 가능의 생성의 마당’이라고 하는 현학적 태도와 회화를 평면으로 환원해가고자 했던 서구 모더니스트 페인팅의 관심사가 교차되는 장소에 자리 잡고 있던 이른바 백색 단색주의에서 벗어나 급변하는 국내외 정치 • 사회 • 경제 상황이나, 유신군사독재체제가 빚어내고 있던 체재 내 갈등과 피로감, 그리고 격동하는 사회 현실은 그 나름의 표상방식을 요청하고 있었다.(예, 285p)


리얼리즘의 창작 방식을 일정한 원리로 제시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는 현실성 또는 당대의 시대성에 충실하다는 것 이다. 이것은 리얼리즘 예술론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은 예술가가 동시대성을 실현하는 길은 세 가지며, 첫째로 그 시대의 이상과 열망 등을 전통적인 미술과 문학이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수사로 표현하는 것 이다. 둘째로 동시대성은 그 시대의 특질을 이루는 구체적인 경험, 사건, 풍속, 모습 등과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그리고 당대적인 것을 실제로는 그 시대를 선행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 태도로 이것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에서 만연한 동시대성에 대한 신비한 개념이라고 했다.(리얼, 115~122p)


이러한 리얼리즘에 대한 기본설명은, 1980년대의 미술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약진을 보이고 있는 형상성의 복권이 현실 참여라는 리얼리즘의 기본 정신과 동시대의 민중운동 이라는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적 경향, 기존까지 이어져 온 형이상학적 관념 회화에 대한 반동과 함께 어우러져 신표현주의 와 극사실주의, 민중미술 진영에서 어떻게 급격하게 대두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특히 이 같은 표현의 회복은 경험적인 사고에 물질의 새로운 존재의미를 추구하는 일련의 물질 실험의 양상으로도 발전되었다. 따라서 1980년대 미술의 전반의 풍경은 대체로 드로잉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 발전, 민주화의 열기와 연대된 현장주의 미술의 출현, 표현의 회복으로서의 폭넓은 매체의 원용과 실험 등으로 점경 된다. 그러면서도 현장주의로 대변되는 민중미술이 기존의 미술계를 공격 대상으로 삼아 그 입지를 강화함으로서 이른바 제도권 미술과 민중미술의 대립 • 갈등이 심화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현, 245p)


이렇듯 리얼리즘의 물결을 타고 본격화 된 반모더니즘은 ‘삶의 미술’을 내세우며 현실참여, 사회에 대한 직접적 비판, 산업사회의 소외된 인간에 주목했다면, 탈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극복을 기조로 삼아 예술을 사회, 역사, 문명과 꾸준히 연결 지으려 했다.(한국현대,225p)


1980년대 중순을 기점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은 모더니즘을 기본 축으로 가정하여 형식화한 추상미술, 권력화 한 미술제도 등 모더니즘의 효과를 비판하고 공격하고 서사적 리얼리즘을 지향한 ‘반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용으로서 다원주의를 표방한 ‘탈모더니즘’으로 구분할 수 있다.(한국현대, 216p)

이들의 미적 경향이 비록 완전한 형태의 것은 아니었을 지라도 정치적으로 민주화 이행과 더불어 과거의 권위적 질서 속에 동반될 수밖에 없었던 획일적 독선적 문화논리를 재평가 하였고 이와 함께 배제되었던 미적 가치의 부분들을 새로운 자세로 인식하게 되었다.(한국현대, 223p)


특히 1980년대 작가들은 전시대의 추상지상주의, 매체적 획일주의, 미학적 순수주의에 대항하는 반모던적 양식과 더불어 매체와 장르의 다원화, 가치의 복수화를 표방하는 탈모더니즘적 성향으로 90년대 한국 포스토모던의 싹을 틔우게 된다.(한국화단, 29p)



3.1980년대 미술문화의 조류


(1)신표현주의: 극사실회화


앞서 언급하였듯이, 1980년대 미술은 경향적으로 생활세계에 대한 서술과 표현을 지향하였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 전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1980년대 미술은 그 방식에 있어서 다원화 되었던 시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하나는 ‘평면과 입체의 후기 양상’과 표현의 새로운 ‘감수성’으로, 사회와 세계에 관심을 보이고 삶 자체에 대한 근본 문제를 풀기 위해 현실과의 관계를 모색하여 인간의 총체적인 삶을 서술하고자 하였다.(눈, 68p)


다른 하나는 민중미술계열을 중심으로 ‘서사적 리얼리즘’이 보여주는 민중 • 민족주의에 기초한 진보주의적 미술이념이다. 이들은 미술을 어둡고 소외된 현실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양식을 차용하거나 한국의 전통도상을 빌려 고단한 민중의 현실생활과 사화문제를 고발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눈, 68p)


이처럼 아주 상반된, 크게 두 가지의 경향의 섞일 수 없는 미술의 이념을 보면, 한쪽에서는 현실적 지평을 새롭게 모색하는 데 경도되었다면, 다른 한 쪽에서는 오직 민중적 현실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에만 역점을 두었다. 전자가 순수한 창조에만 목적을 갖는다면, 후자는 이론과 해체에 목표를 둔다.(신형상,56p) 특히 감수성은 기존의 탈자아, 익명화된 주체의 표현에서 벗어나 자아와 세계 간의 관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표현의 새로운 ‘감수성’은 적어도 세 가지 유형을 보였는데, 그 하나는 인간을 주제로 소통을 강조하는 표현적 형상의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형상에 의한 표현보다는 표현 자체의 정신적 • 물질적 현실의 주제들에 더 많이 관심을 두면서 행위와 세계의 만남을 시도하는 인스톨레이션(설치) 양식이 경우이며, 마지막은 전통 한국화와 관련된 새로운 감수성을 실험하는 경향으로 나뉘었다. 이 경향들은 1980년대의 감수성과 접목된 새 감성양식을 발전시키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양식들 -‘후기양상’, ‘감수성’, ‘민중미술’- 가운데, 표현의 새로운 감수성 운동은 신형상회화의 이념이라고도 할 있는데, ‘후기양상’이 자연과 자아의 내재성의 연속선상에서 사회와의 연계성을 지향했다면, 표현의 새로운 감수성은 1980년대에 확산 된 표현적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미술의 자생적 가치를 발굴하려는 산발적인 운동이었다. 그들은 사회, 자연과 자아를 포함한 종합적 수준에서 미술과 사회의 연계성을 강조하였다. 또 이들은 새로운 감수성에 목표를 둠으로써, 민중미술과도 차이를 보였다. 가령 민중미술이 민족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열렬히 지향했다는 사실과 비교할 때, ‘감수성’은 이데올로기를 수반하지 않은 자유로운 입장에서 감수성의 표출을 모색했다.(눈, 71p)


감수성은 개인으로부터 사회에 이르는 삶과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감수성을 표출했다. 바로 이 점에서 감수성은 ‘후기양상’과 유사한 면모를 갖고 있지만, 보다 더 넓고 자유로운 입장이다.(신형상, 57p) 이러한 움직임은 사실 70년대 후반부터 있어왔는데, 1978년에 여러 신진 작가들에 의해 개최된 《전후세대의 사실주의란》,《형상78》,《사실과 현실》,《시각과 메시지》같은 일련의 소 그룹전에 참여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은, 급변해가는 정치 • 사회적 현실, 도시 등 인간의 현실적인 삶이 문제를 중심과제로 끌어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선전 • 국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종래의 구상미술과는 거리를 유지한다. 그리고 시각 자체이 구조적인 가능성과 한계를 따지며, 회화의 평면성의 문제 등 모더니즘의 유산을 계승하며 ‘새로운 형상성’을 추구한다.(예, 286p)


이렇듯 형상성의 복권은 삶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밀접하게 관련 되어있다. 사실 이러한 형상에 대한 관심은 시대적, 사회적 구성의 변화에 따른 삶의 변화 외에도 국제 미술 동향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 중 하나는 모더니즘 작가들에서 새롭게 자각되기 시작한 드로잉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모색에서 비롯된다. 그리기와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백색 모노크롬 작가들이 설정해놓은 논리적 폐쇄 회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형상성을 추구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무엇보다 더욱 직접적인 영향은 1960년대 이래의 대중문화의 확산 속에서 미술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새로운 재현적 경향의 회화들 예컨대, 팝아트, 포토 리얼리즘, 하이퍼리얼리즘 등 유행 사조의 수용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생활이 하찮은 일상을 실물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하게 정밀 묘사하는 당시 대세를 이루던 극사실주의적인 경향의 작가들에게서 잘 확인된다. 김강용의 시멘트벽돌, 김창영이 모래밭, 변종곤의 타이프라이터, 이석주의 실내, 주태석의 철로, 지석철의 소파 쿠션 등이 좋은 예이다.(예,286~287p)


그렇지만, 이러한 형상 욕구를 서구 유행사조의 추수로만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경향은 대중문화가 일반화되어가던 당시의 시각 경험이나 시대감각이 산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지 기법적으로 극사실성에의 집착을 넘어서 보도블럭이나 철길의 단면, 집적된 벽돌이나 블록의 클로즈업, 삼류극장의 낡은 포스터가 붙어있는 문짝, 지하철 공사장 칸막이, 석유 드럼통 등 그들이 그리고 있는 형상들은 이미 대중문화 사회 속의 일상의 소외와 분열을 리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관념성에서 떠나 경험적 현실성으로서의 관심의 이동이며, 그런 점에서 표현이 자유롭지 못한 유신체제 아래서 전개된 형상성의 복원이야말로 삶의 현실로 향하는 징검다리가 되고 있다.(예, 287p)


(2)민중미술


민중미술은 신표현주의 미술과 그 흐름을 같이하나, 그 강렬한 이데올로기적, 현실 참여적 성격과 사상 전달을 위한 수단적 성격으로 인하여 위의 신표현주의 와는 구분된다.


위의 새로운 ‘감수성’은 ‘주관주의적 경향’, ‘현실 체험’, ‘자아’에 관련된 의식을 형상화라는 재현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이들에게 형상성은 기존의 모더니즘의 특징이던 ‘물성’, ‘환원’, ‘손의 상실’의 구조가 아니라 ‘표상’, ‘확산’, ‘손의 회복’등 생활 세계, 현실이 강조됨으로서 작가가 작품에 내재 • 은폐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화자로 등장하였다.(신형상, 53p)


이러한 사실은 점차 작가 자신의 주체를 강조하게 됨은 물론, 인격적 • 윤리적 관심의 고조를 동반하게 되고(서술, 165~171p) 70년대의 고립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합적’개인으로서 사회 내에 존재하고 사회와의 연대를 통하여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사회에 있어서 역동적 기능자로서 이해하며, 예술을 자연과 자아의 세계로부터 확장해서 사회 속에서의 세계, 간단히 말해 ‘생활 세계’, 현실로 눈과 마음을 돌렸다고 할 수 있다.(눈, 62p)


이렇듯 앞의 극사실회화, 신표현주의는 형이상학적인 거대 담론 보다는 다양성, 다원화를 바탕으로 삶의 세계 내부에서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들 -역사, 종교, 민족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해체 하거나 ‘새로운 감수성’을 구축함으로서 진정한 자유로운 삶의 모습을 꿈꾸는 미술 운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정치 • 사회적인 흐름은 이러한 형상성의 복권을 통한 억압된 자아의 해방과 자유를 누리기에는 시대적으로 적절치 못하였다. 10여년에 걸친 고도성장기의 종말과 오일쇼크의 등으로 인한 생산력 감소가 사회에 그늘을 드리웠고, 정치적으로는 YH 사건, 김영삼 신민당수 국회 제명에 이은 10.26 사태, 그리고 12.12 쿠데타에 이은 광주민주화항쟁 등으로 이어지며 혼란기를 이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형상성’에 대한 관심은 이제 단순히 이미지나 혹은 일루젼의 복권이라고 하는 미학적 차원의 문제로 머물지 않았다. 특히 12.12 쿠데타나 광주민주화항쟁 등과 같은 체험은 정치적 위기의식을 전면화 시켜 민족적 정서나 극사실주의, 초현실주의 기법 등 일루젼의 문제에 기대는 것 만 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모더니즘적 형식논리나 미에 관한 추상적인 관념성, 더 나아가 중성적인 형상성마저 더 이상 유효성을 지니기 힘들게 되었다.(예, 288p)


민중미술은 초기 소그룹 운동으로 진행되었는데, 80년대 전반기의 경우 대체로 70년대를 극복한다는 측면이 강조된 시기로 이른바 제도권 미술과 민중권 미술의 대립이 첨예화 되었던 시기로 진단한다. 후반은 모더니즘의 후기적 양상이나 민중적 이미지의 예술에서 그 나름의 형식적인 점검이 활발히 전개된 시기로 평가해볼 수 있다. 막연한 민중미술의 형식이 구체적인 매체로 부각되었으며, 미술은 선전, 선동의 수단화로서 뚜렷한 색채를 드러내었다.(시대, 186p)


1980년대 전반의 소그룹 중심이 현실 재현적인 경향의 작업들은 처음에는 시각예술이 언어성을 회복하는 데 눈을 두었으나 점차 현실 변혁적인 성격을 띠며 전개되면서 미술인들과 전두환 정관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인들에 대한 탄압은 예기치 않게 일반 대중들에게 까지도 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러일으켰다. 1980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러한 흐름은 민족미술협의회,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이라고 하는 민중 • 미술운동에 대한 거대한 전국적인 조직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으나 긍정적인 성과에도 불고하고 70년대에 경험했던 집단적 획일성을 미술계에 다시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들이 활동은 계급성, 전투성, 대중성을 강조하는 조직 결성을 통해 획일적 단일 행동 대오를 형성하며 체계적인 조직 활동을 가능하게 하였지만 기존의 한국미술협회 와의 대결 구도 속에 미술계의 주요 이슈가 조직과 파당, 정치, 헤게모니 싸움으로 집중되는 부작용 또한 가져오고 말았다.


민중미술은 일종의 현장 그림인 걸개그림, 대중의 교화 수단이나 소통의 방편인 만화, 설명적 그림 등 새로운 형식을 제작해내었고 그것들이 집회나 데모의 현장에 설치되며 그 기능이 점검되었다. 내용면에서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하고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지며, 소재적인 한계, 형식적 완성도에 있어서도 문제가 뚜렷하지만(시대, 186p) 기존의 형식과 관념, 제도권에서 이탈하여 미술의 참여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걸개그림의 경우 민중미술의 흐름 중 현장미술이라는 흐름을 타고 시도 되었는데, 현장미술은 계급모순과 민족 모순에 대한 각성을 표출하는 방식이나 장소의 문제이기도 했다. (소통, 57p)


걸개그림은 공동창작에 의해 기획, 제작되며 당시 많은 소규모 동인들에 의해 제작되었며 현장성, 특히 광장에서의 소통을 목적으로 제작된다. 걸개그림은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의 외침이기 때문에 공간귀속성 적 특징을 가지며, 그 공간에 있는 민중들에게 단일대오로서의 외침을 형성한다. 이러한 걸개그림들은 집회 장소의 청각적 언어를 이미지화 시켜 시각언어로 응집시킨다. 이러한 걸개그림은 선전 선동적인 특징을 가지며 그렇기에 그 자체로는 미학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걸개그림의 미학적 가치는 더 많은 민중들과 더불어 하나의 외침을 만들어 낼 때이다.(소통, 60~61p)


현장미술은 세 가지 지향점을 드러내는데, 첫쨰, 변화한 상황에서 현장미술은 장소의 범주로 국한할 문제가 아니라, 상황으로서 현실에 문화적 개입을 통해 현장성을 획득한다. 둘째, 전시장 공간을 담론의 생산과 실현의 장으로 확장한다는 점이다. 셋째, 특정이슈와 특정 장소가 정확히 만나는 이상적인 상황에서 현장미술은 물리적인 공간으로서 현장과 그 지점의 이슈가 참여미술의 형태로 나타나 전향적인 양상의 현장미술이 가능하다는 점이다.(소통, 58)


(3)신매체미술


1980년대의 시각문화 환경의 변화와 신매체의 등장은 평면회화 중심의 1970년대 후반 미술과는 다른 매체 측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타라는 설치미술 장르를 본격적으로 개척 함으로서 1970년대 단색주의 미술이 지닌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민족과 민중의 기반 위에서 소통 가능성을 모색한 소그룹 ‘두렁’ 역시 전통 매체의 실험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예, 303p)

메타복스 와 난지도는 이른바 ‘평면의 회화화’라고 하는 1970년대의 문제 설정에서 벗어나 과감히 ‘설치의 공간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난지도는 문명, 산업사회라는 특수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주변 잡동사니나 폐품, 그리고 볼품없는 재료들을 과감하게 기용하여 자신들이 지닌 사물에 대한 시각을 명료하게 표출하고자 했다. 반면 메타복스는 평면에서 일탈하여, 형식주의의 극복을 위한 의지를 뚜렷이 하였다.(예, 303p)


특히 표현에의 열망은 닫힌 전시실에서 벗어나 활동공간을 자연으로 확산시켜 1981년에는 《겨울 대성리전》,《야투 현장미술연구회전》등을 시작으로 넓게 확산되었다. 행위예술 또한 활성화되었는데 1960년대 해프닝이 전위적이고 1970년대 이벤트가 개념적이어서 일반 대중과이 소통이 어려웠던 반면에, 1980년대 들어 퍼포먼스는 표현성과 대중성을 중시하고, 무용, 연극, 비디오 등 대중매체와 결합하여 소통성과 참여도를 높임으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예, 304p) 특히 이 시기의 퍼포먼스는 전과 같이 표현 행위의 순수성으로서 행위 그 자체를 중시하기보다는 연극적 행위 공간 자체를 표현의 장으로서 현현 시키는 성격이 강하다.



Ⅳ. 결론


1960~1970년대가 사물과 주체를 동시에 부정함으로서 눈과 정신을 외부로 전환시켰다면, 1980년대는 외부적으로는 정치, 사회적인 혼란이 계속되었고 사상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이 유입되면서 예술계에 있어서 기존과는 근본적인 변화를 보였다.

후기양상은 1970년대의 고립된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계와 자아 간의 관계에 관심을 돌렸으며, 자아의식을 물성으로 환원시켜 평면과 단색으로서의 형식으로 표현하였던 경향을 벗어나 정감적인 기분을 비롯한 경험적 내용을 앞세워 서술과 표현을 지향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 정신은 70년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으며 여전히 자연과 자아의 내재성의 연속선상에서 사회와의 연계성을 지향하였다.


민중미술은 역사 • 사회적 내용을 담은 주제들을 다룸으로서 인간 해방과 민족 통일의 이데올로기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들에게서 역사 • 사회적 주제란 주로 한국의 불행한 근대사와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체제를 부정하며 궁극적으로는 현실과 체제를 전복하려는데 미술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도구로서의 유용성을 강조하였다.(서술, 70p) 이들은 예술이 사회와 연결되어 움직이는 하나의 현실임을 강조하며 작품의 내재성에 대한 관심을 의식적으로 혐오하였다.


신표현회화로 대표되는 극사실회화와 표현 자체의 정신적 • 물질적 현실의 주제들에 더 많이 관심을 두면서 행위와 세계의 만남을 시도하는 인스톨레이션 성격의 신매체미술은 각자 1980년대 들어 급변한 생활환경과 그에 따른 새로운 감수성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었는데, 외국의 극사실회화가 형상과 재현이라는 관계를 ‘그려진 오브제’ 개념으로서 의도적으로 일치시키려고 했다면, 한국의 극사실주의는 그리는 것과 그려지는 것 사이의 중첩을 애초부터 바탕으로 깔고 들어가며, 주체와 실제가 따로 있지 않다.


그들의 자연주의는 인간 근원에 존재하는 형상성에 대한 충동이며 -구상충동- 관념성에만 천작하였던 기존의 관념적 예술과 불안한 사회흐름의 대두에 따른 대한 시대적인 참여 운동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은 작품의 상황과 현실의 상황의 일치를 통해서 리얼리즘의 주관적의적 성향을 표현하였으며 서술과 표현의 의지를 가지고 형상을 통하여 현실의 모습을 작품 그 자체로 그려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의 작업은 기존의 극사실회화 라는 명칭 보다는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신매체미술은 형상보다는 행위와 물질의 만남과 드라마를 연출함으로서, 거친 몸짓의 흔적을 담은 오브제와 인스톨레이션을 통하여 일상적, 개인적 감성에 바탕을 둔 실험을 꾀하였다. 타라, 메타복스, 난지도 등은 자유로운 시각에서 개인의 삶을 전개함으로서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전개 하였다.


이 시기의 또 다른 모습으로는, 미술 운동의 그룹화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삶은 개별적인 것이 아닌 전체와 긴밀히 연결된 하나의 망 이라는 일념 하에 미술 역시 하나의 현실로서 작동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서 본격화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역설적으로 예술의 다원성 이라는 이념 하에 펼쳐 질 수 있는 자유로운 몸짓으로 오히려 제약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결과적으로는 예술의 담론을 획일화 하고 정치화하는 하나의 공간으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삶과 개인 주체를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 짓고 그것을 하나의 움직임으로서 구체화하여 하나의 현실적 운동으로서 현현시키려 한 의도는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80년대는 미술과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의 치열한 움직임으로서 용솟음쳤던 역동적인 시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