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때 서예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글을 연습하다가 삑사리가 나서 무성의하게 나머지 획들도 마저 그어버리고 남은 여백들에다가 방금 틀렸던 획을 연습하면서 종이를 새카맣게 만들고 있었다. 지나가시던 선생님께선 그런 나에게 "왜 과거를 부정하려 하느냐, 좋은 과거만 너의 인생이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그러지 않은 것이냐"며 좀 더 신중할 것을 당부하셨었다. 쪽팔리고 부끄러웠었다.
"붓글씨를 쓸 때 한 획의 실수는 그 다음 획으로 감싸고 한 자의 실수는 그 다음자 또는 다음다음자로 보완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행의 결함은 그 다음 행의 배려로 고쳐갑니다. 이렇게 하여 얻어진 한 폭의 서예 작품은 실수와 사과와 결함과 보상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양보하며 감싸주는 다사로운 인정이 무르녹아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다.
상대방을 (비교적)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나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에서 먼저 시작하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더러 상대방을 이해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또한 모순일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스스로를 쉽게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타인의 목소리가 소음 이상의 의미를 갖길 기대했다간 좀 우울해질 것이다.
김규항 선생님의 "비판적 해소"라는 글(http://gyuhang.net/2879)을 보며 과거가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남은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 아집에 빠져 상대방 역시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아직도 일제시대의 문제나 군부시대의 문제들이 제대로된 역사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상한 교과서가 승인을 받았고 어떤 배우는 누군가를 연기했다가 차기작 섭외가 끊겼다고 한다. 역사 속의 한 사람을 두고서 누군가는 그의 그늘만을 이야기 하고 누군가는 그의 성취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없는 곳에선 새로운 대화가 태어날 여유도 낄 곳이 없다. 죽어도 죽지 못한 좀비가 무덤에서 기어 나와 사람들을 이성을 깨물고 마비시키고 있을 뿐.
스스로의 과거를 인정하고 그것을 배려한 현재의 획을 긋는 것, 그것은 서예가 "書"의 예일 뿐만 아니라 "恕"의 예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의 발견이며, 새카맣게 칠해져버린 나의 종이에게 서예가 던지는 교훈일 것이다.
페친 수가 줄었다 늘었다 하는데 왜인가 보니까 내 동창들이 친구를 끊기도 하더라. 내가 미안하다 쪼다들아. 그리고 내 글을 볼지 안 볼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나랑 친구를 끊지 않은 나랑 다른 입장을 가진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사실 이 얘기는 http://kilt.tistory.com/187 에서 했었던 얘기를 다시 반복한 것이다. 김규향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