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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written

정체성

by AKHWEE 2014. 1. 10.

밀란 쿤데라랑 신디 셔먼을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엮어보자. 대충 해봤는데 나름 잘 어울리네. 둘이 잘됐으면 좋겠다.



1.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이라는 소설은 한 커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자신이 늙어감에 따라 매력이 없어지고 있다고 여기는 여자와 그런건 전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녀의 남자친구의 이야기이다. 여자가 거울을 보며 절망스러워 하는 동안 옆에서 남자친구는 섭섭함을 느낀다. 그는 '당신이 젊던 늙던 당신 곁에 있을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건가요?'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본다. 


2. (계속 소설 얘기) 우울해하는 여자친구를 위해 남자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익명의 가상의 인물은 여자친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그 여자친구를 스토킹하기 시작한다. '당신을 봤습니다', '너무 예쁩니다' 뭐 이런 우편이나 쪽지를 남기면서 말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여자친구가 다시 활기를 찾은 것이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물론 남자친구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다시 건강해지는 여자친구를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만들어낸 익명의 인물에게 질투와 분노를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활기를 찾은 그녀의 모습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3. (이건 잡소리)  단 두 사람의 이야기만으로 이렇게 풍요로운 서사를 연출할 수 있다는게 참 신통하다. 아주 소박한 일상으로부터 시작해 거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밀란 쿤데라가 괜히 유능한 소설가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유명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어떤 소설일지 기대 안 할 수가 없다. 

4. 한 사람에겐 여러 면의 모습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어느 관계 속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모습을 달리 한다. 내 예를 몇가지 들자면, 나는 우리 가족에선 첫째 아들이고, 학교에선 학생이고, 소방서에선 군인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 여러 모습 중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내가 소방서에서 평범한 미대생처럼 행동한다면 사람들은 크거나 작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아무리 찰라같은 순간이라 할 지라도 하나의 순간엔 무조건 하나의 얼굴만이 실재하는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떤 경우엔 그 얼굴과 상황이 어긋나는 경우가 생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너 낯설다"라거나 "적절하지 않다"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물론 김대기는 항상 적절하다)

5. 소설 속 주인공처럼, 만약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나를 포기하고 내가 만든 어떤 이의 힘을 빌린다면, 그리고 그렇게해서 그가 행복해한다면 과연 나도 행복할 수 있을까? 또한, 나 역시도 그가 갖는 여러 면의 정체성 중 특정한 관계 속에서 비춰지는 상태의 얼굴만을 보면서 그의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단정지으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았을까? 작년 하반기엔 이런 생각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행동을 바꾸는 것은 더 어렵다는 것을 덤으로 깨달았다.


6. 미국에 있을 때 모마에선 신디 셔먼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는데 그 전시는 이상하게도 질기게 날 따라다니는 어떤 화두를 남겼다. 사람들은 그녀의 작업의 파격적인 면이나 키치한 면을 주목하는데 난 그런 것들에선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고백하자면 불감증이 있다(농담). 대신 신디 셔먼은 한 번도 자신의 쌩얼을 노출하지 않았다는 점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쌩얼을 가리는 방법이 단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화장을 하거나 변장을 하거나 심지어는 몸에다 가짜 신체기관을 장착하기까지 한다. 매번 다르게 보여야만 하는 강박에 걸린 사람처럼 말이다. 나는 그녀가 작업을 통해 '아무리 노력해봐도 나한테 꼭 맞는 정체성을 찾는 것이란 어려운 일이예요'라고 말하려 하는 건지 '정해진 정체성이란 것은 없습니다. 유한한 개수의 정체성이 무한히 있지요'라고 얘기하려 하는건지 까진 알 수는 없다.


7.그다지 매력이 없거나 심지어 불편하기도 했었던 신디 셔먼의 이미지들은 계속해서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앤디 워홀 같이 단번에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신디 셔먼은 그녀가 누군지 도대체 알기가 힘들다. (-갑작스런 앤디 워홀의 <등장>- 워홀의 이미지와 대중매체의 관계에 대해선 여기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으니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워홀의 </퇴장>) 물론 그 둘은 대립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같은 직선 위에서의 정도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의 개수라는 직선이 있다면 워홀은 다른 가지수들을 쳐내 최대한 1에 가까이 가 있는 것이고, 신디 셔먼의 경우엔 계속해서 무한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8. '정체성'이라는 단어 뒤에 가장 흔하게 따라오는 말은 '혼란'이라는 말과 '확립'이라는 단어이다. '혼란'과 '확립'은 꽤나 다른 의미이지만 그 두 단어가 같은 무게로 등장하는 까닭까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우리는 '정체(正體)성'이라는 것이 정체(停滯)된 무엇이라고(일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난 아니더라도 타인의 정체성에 한해선 무자비하게 단정지어 버린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특정한 정체성을 발견하거나 획득하기 위해 꽤나 애쓰고 있다. 물론 그게 필요한 지점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환경에 따라 지배적인 정체성이란게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라던지 심리적 안정(?) 따위를 위해 그런 태도가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는 것 또한 잘 안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나 신디 셔먼은 결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역시 습관적인 행동을 바꾸는 것은 새삼 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