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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written

적절한 미술

by AKHWEE 2014. 3. 7.

홍태림의 글에서 서진석의 해명 댓글 중 흥미로운 것이 있었다.

홍태림의  "필자가 이번 공장미술제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을 봤을 때 전반적으로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ASYAAF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들과 별반 다른 지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라는 말에 서진석은 "제 주위에는 매우 실험적이고 성공적인 전시로 평가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해외의 몇몇 미술인들은 영국 등지에서 보기 힘든 실험적인 전시였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라는 말로 응수 했다.


쉽게 말해 "별로다"라는 주장(?)에 "좋았다더라"라면서 반박한 것이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기호는 단순히 취향의 수준에서 논해져야 할 문제이지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번진다면 누군가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는 폭력의 양상을 띄게 될 뿐이다. "내 맘에 든다 = 옳다"라는 식의 주장을 할거면 "네 맘에 드는 것도 옳다"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니 사적인 차원에서 존중받아야 할 문제일 뿐이다.


어느 전시에 관한 전시 서문이나 전시 비평문을 보면 대개 그 글을 쓴 사람이 좋아하는 철학자나 심리학자 등의 이론가의 얘기를 가져와서 작품을 해석하고 있다. 자기가 좀 잘 아는 이론으로 작품을 재단하는 것이다. 작품을 단지 그 이론을 재현해낸 것으로 만든다. 이 작품은 이러이러한 의의가 있으니 이러이러한 요소들을 보라고 작품에 대한 해석의 방향을 제시(제한)하는 것이다. 뭐 그러고 싶어서 그런다기보단 그게 하나의 룰이 된 것 같다. 엄청나게 형식적이다. 물론 여태껏 내가 읽은 글들은 평론가가 쓴 글이 아닐 수도 있다.


근데 ㅍㅍㅅㅅ의 이승환이 sns에서 '인문학자'들을 비판하며 했던 말을 보자. 

"옛사람, 외국 학자의 지혜를 빌리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 글을 보는 당신은 아마 100년 전 학자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나 지금 이곳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왜 그들은 지금 이곳에서 눈을 돌리고 적당히 외국 학자나 이론으로 문제를 퉁치고 끝내려 하는가."

과연 그 평론가들이 작품의 해석을 위해 들이대는 프레임으로서 이름있고 권위있는 이론가들의 말들이 과연 그 작품에 유효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품을 볼 때 습관적으로 읽을 거리를 찾는다. 작품을 보는 것보단 글을 읽는 편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적 허영이라느니 개소리라느니 하는 말만 남는다. 왜 그럴까? 

임옥상선생님의 말도 보자. 

"90년대 들어 한국 미술에서 개념 미술이 극성을 부리는 것을 보아도 이러한 힘이 괄목할 만하게 팽창했음을 알 수 있다. 개념 미술은 톰 울프의 말대로 '채색된 말(painted word)'이다. 논리의 미술 혹은 논리 그 자체이다. 논리는 체계요 질서이다. 개념 미술이 주류가 되는 것은 이론이 미술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예다. 이론의 미술 지배, 작가가 이론가에게 복속되는 순간이다. 이는 이론이 미술을 관리하는 체제의 정착을 의미한다.

     개념 미술에서는 온갖 사회 문제가 단순하게 개념화된다. 분단 · 계급 · 성 · 인권 · 환경 · 정치 등 우리 사회의 문제가 제도화된 미술로 환원되고 추상화되어 무정란으로 화하고 만다. 순서를 바꾸고 문제의 강약을 조정하고 시간을 조절하고 장소를 옮긴다. 문제를 다루되 문제를 체험할 수 없고, 행동하는 것 같으나 실천은 불가능하며, 관심을 유도하는 듯하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철저히 차단된다. 미술인들 특히 작가들에게 지적 우월주의를 부추기고, 객관이라는 허위 의식을 즐기게 하고, 가치 중립적이라는 달콤한 말로 어느 편에도 편입되지 않은 듯한 입장을 견지하게 함으로써 그것이 순수 의식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현실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개입과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는 문화 행위는 자기 과시나 자기 전시, 신분 상승 등을 위한 예술의 수단화 · 방편화에 다름 아니다. 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허위 의식을 낳고, 결국은 예술의 운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미술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모든 사회 문제를 끌어들여 그 모든 것을 미술적으로 재편하고 행위하여 결론내리는 것, 즉 사회의 모든 문제를 미술의 질서 체계로 환원하는 것은 생생한 현실을 왜곡하기 십상이요 편의주의에 따라 자의적으로 현실을 재단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영역주의는 소수 미술의 파워 엘리트로 하여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하고 말 것이다. 그들을 정점으로 하는 문화 권력은 미술을 대중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도 대중으로 하여금 미술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부추길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 미술의 허무주의와 패배주의를 심화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평론가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작품을 평가해선 안된다. 우선 앞서 언급했듯이 내 맘에 들고 안들고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을 과학적이니 역사적이니 하는 말로 포장하려 하는 것도 비양심적인 행위이다. (대중음악 평론가들이 이런 일들을 많이 한다. 그냥 좋다고하면 무식해 보일까봐, 유식해 보이려고 이런저런 얘기를 끌어들여 좋다고 말할 뿐이다)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평론가의 평론은 권위에 기댄 허세일 뿐이다. 

(내가 인터넷 공간에서의 토론? 논쟁?만 봐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서로 같은 말을 단어만 바꾸면서 하는데, 이는 겉으로 보기엔 뭔가 치열한 상황을 연출하는 듯하지만 알고 보면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정력 낭비일 뿐이다. 평행선은 앞으로라도 간다는 점에서 차라리 런닝머신과도 같다고 하는게 낫겠다. 박영택 선생님의 말 "꽃이 있기에 꽃을 그린다 뉘앙스에서 읽을 수 있 것은 그려야 한다 화가로서의 당위성이다. 이 당위성 앞에서 그 대상이 하필 꽃이어야 할 필요 없지만 꽃이 아니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을 음미해보자. 이 말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작가들은 지금보다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당신의 영혼에 자유로울 여지가 있었다면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한 작품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작품이 사회적인 기능을 하길 원하는 작가라면 모든 사람에게 이해되는, 만족시키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편, 작품의 사회성은 모르겠지만 미학적인 뭔가를 성취하길 원한다면 평론가들의 눈치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다. 작가는 어쩄든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한다. 작품은 작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거꾸로 말한다면, 누군가는 그 작품을 좋아할 것이라는 얘기도 된다. 뭔가 진정성이 담겨 있고 그로써 작품이 어필하는 과정에서의 논리가 억지스럽지 않다면 그 작품은 최소한 누군가의 예술에 대한 수요를 충족할 수 있다. 물론 강박에 빠진 작가와 다양한 성향의 작가를 수용하지 못하는 조그만 시스템은 그와 그 작품을 연결시켜주기란 매우 힘들다. 시스템은 그 시스템이 수용할 수 있는 작가만 수용한다. 나치는 <퇴폐미술전>을 열었었고, 소련은 "사회주의리얼리즘"이란 미술을 양성했고, 미국은 <모마>를 지었다. 


평론가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부분이 여기 있다. 모든 전시와 작품은 같은 목표나 소비자를 지향하고 있지 않다(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래선 안된다. 현대 미술이 뭔가?) 평론가의 글이 바로 선다면 여러 공간들이 잃었던 정체성을 회복할 여지가 생기게 될 것이다. 공간이 어떤 목적을 가진 전시를 기획하여 작가와 작품을 선정하고 전시를 한다(핫한 작가와 작품들 모아놓고 대충 어떤 단어 하나 던져서 퉁치는 그런건 논외로 한다). 이 과정에서의 합리성을 평론가가 판단한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그 전시의 목적이 A인데, 그것과 전시의 방법이 수긍이 가는가, 꼭 화이트큐브여야 했는가, 꼭 길거리 퍼포먼스여야 했는가, 작가 선정 방식은 타당했는가, 전시 후 반응들은 처음 노렸던 효과와 비교해 봤을 때 어떠한가 하는 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작품 자체에 대한 평론이 아닌, 전시를 포함한 예술 기획에 대한 총체적 평론이라고나 할까.. 작품은 관객의 주관적인 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목표는 절대 거창하지 않다. 적절한 작품을 적절한 관객 앞에 적절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작가나 작품이 아닌 작품이 보여지는 과정 그 자체에 대한 평론이 쓰이는데 역량이 집중되면 좋겠다는... 게으른 작가 지망생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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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다면 목표를 놓고 그것을 추구하는 수단, 과정, 그리고 사후 결과에 대한 분석이 이뤄지게 되는데 이는 좋고 나쁘다는 평가 보다 훨씬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게 된다. 사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증해나가는 것은 과학적 · 합리적인 사고의 매우 기초적인 과정이다.


이런 평론을 제안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은 

1) 창작을 함에 있어 작가의 자유도가 더 커질 수 있다.

2)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들은 대충 전시를 할 수 없게 된다. 타당한 전시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리서치를 해야 한다. 공간마다의 독립성과 정체성이 보장된다.

3) 작품의 성격에 따라 더 다양한 층의 관객들과 소통의 기회가 만들어진다.

4) 위 전반적인 논의의 과정 안에서 취향의 강요가 아닌 더 생산적인 이야기가 오고갈 수 있다. 


보수적인 사람들의 예상되는 반론

1) 명예를 중시하는 작가들은 권위있는 공간에 걸리기 위해선 어차피 다시 눈치를 보게 된다. 지금도 크게 아트페어 작가나 비엔날레 작가로 구분할 수 있다

2) 까이기 싫으니까 안전빵의 전시를 하게 된다. 1),2) 종합해보면 그래봤자 지금과 달라질게 없다는 얘기.

3) 달라질게 없는 곳에서 관객도 달라질 수 없다. 여전히 미대생이나 미술계 사람들이나 컬렉터 위주로 돌아가겠지.

4) 그런 평론글이 필요하다 해도, 일단 관객들은 작품에 대한 해설을 필요로 한다. 


반론에 대한 반론

1) 그건 소수를 위한 거다. 대다수의 작가가 저마다의 개성으로 나름대로 먹고 살려면 다양한 취지와 미감을 가진 공간이 필요하다. 소수를 위한 주류는 다수의 비주류와 패배자를 만든다.

2) 그럼 대놓고 리움 워너비라고 밝혀라. 미사어구들로 스스로를 기만하지말고. 공간의 다양성은 다양한 작가의 등장을 가능케 한다. 작가들은 저마다의 예술관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리움은 모든 작가들의 창작욕을 수용할 수 없다. 

3)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작품이 향유될 수 있는 새로운 유통 구조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는 중

4) 전시 기회단계에서 예상 관객층을 고려할 수 있다면 해설은 필요 없다. 그 작품이 수용되길 목표로 하는 그 관객이 역량과 예술기획의 적합성도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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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달면서 글이 좀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부실한 글을 아래 댓글을 참조하면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 1, 적절한 미술이란 누구를 위한 적절함인가? 1)작가자신 2)일반 대중 3)겨냥하고 있는 일정한 수준의 관객.
  • 2, 평론가 도 등급 있다. 1)주례사적 평론가 2)인상 비평가..대표적...오광수 등등 3) 현학적 비평가...아무튼 평론은 무용하고 사실상 이런 류의 평론가가 자신의 작품을 거론하는 순간 그 작품은 사살된다. 
  • 3. 자신의 작품이 나오는 동기나 작품의 과정을 남의 시각( 비평가의 눈을 빌려)으로 풀어헤쳐야 한다면 사실상 작가로써 자격이 없는 것이다. 
  • 4. 평론은 언제나 무용한 것이고 사실상 작가에게도 관객에게도 도움은 되지 않는다.
  • 5.작가에게 미학이 필요한 것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이론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내가 사물 혹은 대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그것을 다시 어떻게 표현하고자 하는 작업과정의 진술이 그 목적이 고....다시 그진술의 정리(이것이 미학)가 작가 자신 작업 의 재창조에 근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  6.중요한 것은 미술이 손으로 그리던 시대는 이미 100년 전에 종말했다는 것이고...당연 자신의 작품형성 논리를 구성하지 못해..주례사 평론가 나 현학적 관념의 편론가의 머리를 빌려 설명해야한다면...미술은 이제 포기해야만 한다.

  • 1. 이 작가의 작품이 어떤 사람한테 어떻게 보여지는게 적절한지 이 문제는 큐레이터가 기획단계에서 판단을 하고, 평론가는 그 큐레이터의 기획 과정과 결과가 유기적이고, 타당했는지를 평가해보자는 생각의 글이었습니다..ㅎㅎ 작가와 작품이 어떻게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지 그런 의미에서..ㅎㅎ
    쉽게 말해 작가/작품 - 평론가의 구도를 큐레이터 vs 평론가 이렇게 돌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  2. 제가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론이 좀 의미없다는 느낌을 받은건 아무래도 1), 3) 류의 글을 많이 접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뒤에 3.4.에서 말씀하신 문제들도 평론이 작가와 작품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  5.6... 아,..동의합니다! 이상한 글들이 그 미학과 작품의 관계를 왜곡시켜왔었던 것 같네요..
  • 임옥상씨의 견해도 문제가 있습니다만 다른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죠.
  • 정말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많은 미술가 지망생이 미술을 손으로 그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감각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지만....

  • 작업을 하면서, 다시 말해 앞서 언급하셨던 '작품 형성 논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모순에 부딪히면, 습관적으로 감각에 의존해서 수습해버리고 다음 단계로 비약해 나가게 되는 것 같아요(아무래도 그게 편하니까?)... 
    한편으론 또 그 '논리'를 정말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어떻게든 말로써 합리화할 수 있는 작업을 내놓는 경우도 많은 것 같구요. (이건 크리틱에 대비한 방어태세?...)어쨌든 딜레마이긴한데..
    아마 전자는 저학년일수록, 후자는 고학년일수록 그러지 않나 싶은게 학교 다니면서 받은 느낌입니다. 물론 저도 그 극단 중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겠지만요..ㅎㅎ;;

    그래서 나름 저도 작가 스터디(?)를 할 때 거기에 주안점을 두려고 하는데 체계적이진 못하고 겉핥기에 그치고 있지요..ㅜㅜㅜ
  • 미학적 논리로 무장하는 것은 크리틱적인 방어를 위함 목적이 아니라....1) 현대미술이 기존 미의식이 아니라.. 인식미에 기대고 있고 2) 올바른 작업을 하기위한 기본적 사고 훈련과정이기 때문입미다. 요즘은 자기작업의 논리를 갖게 하는 훈련.학습을 서구에선 초등학교에서 부터 교육합니다. 생각에서 출발한 것을 재구성하지 못하고 자각하지 못한다면...그 작업은 우연이나 감각으로 나온 것이어....재생산도 안되지만 발전이 있을 슈 없어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