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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와 제주도, 그리고 세한도

by AKHWEE 2014. 2. 27.

외장하드에서 발견한 2011년도 글..



<세한도>의 그림 부분



들어가며

어쩌면 보편적일수도 있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소개하며 글을 열어보고자 한다. 사람은 누구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관계의 성격에 따라 발견되는 정체성의 형태도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사회에서의 흑인들은 자신의 검은 피부색을 통해 자의식을 형성한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에게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페미니즘 작가가 자신의 여성성을 소재로 작업을 하는 이유는 그 사회의 주류문화는 남성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체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었던 시대의 개인들은 집단으로부터 벗어나 개개인의 개성으로부터 정체성을 발견하려 노력하기도 했었다. 핵심은 (혹은 우리)’(너희)’와 어떻게 다른 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가들은 과거에 비해 정체성을 인식하는 데에 훨씬 더 자의적이고 의식적이다. 미국과 유럽이 문화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시대에 한국에서 태어나 예술가를 지망하고 있는 나의 작품엔 어떤 감수성이 담길 수 있을까? 물론 같은 한국인이라 할지라도 다른 경험을 통해 다른 정체성을 발견하고 있음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미술대학이라는 집단 안에서도 남성과 여성, 출신 학교나 전공(인문계인가 예술계인가) 등으로부터 발견되는 정체성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작품에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없던 학생들이 유학을 가거나 한국인 작가들이 해외로 진출하면 한국적인 요소들이 작업에 등장시킨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는 과격한 개성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라기 보단, 해외에 있는 한국인 작가들이 '국적'이라는 요소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예술이 예술로서 기능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로서 특수성을 통해 보편성을 호소해야 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서의 특수성은 작가 개개인의 개성을 의미하고 보편성은 말 그대로 객관적이어서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 간이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감대를 의미할 것이다. 보편성이 배제된 예술은 아무에게도 소통될 수 없으며 나아가 감동의 경지까지 사람들의 삶을 이끌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의 감동은 감정이 움직이는 경험으로서 개개인의 행동의 변화를 주어 결국 삶의 변화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에 과연 보편적인 가치가 있는가(소통이 되는가)라는 질문이야말로 예술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신영복 선생은 변방은 창조의 공간이라 말한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는 변방은 언제나 창조적 역량으로 꿈틀거리고 있으며 새로운 중심부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 동양이라는 변방, 그리고 그 변방의 변방인,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문화적인 기반이 부실해 보이는 한국이란 곳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과연 어떤 예술을 성취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을 통해 학예일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되는 추사(秋史) 김정희(이하 추사)를 조선의 선비정신의 표본으로 인식하고 그의 삶과 그가 남긴 <세한도>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시대에 추사의 정신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밝혀내보도록 하자.

이로써 이 글은 예술가 지망생으로서의 내가 예술가는 인간을 위해 어떤 예술을 남겨야 하는 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한국인으로서 난 어떤 선험적이며 보편적인 동시에 특수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추사 김정희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추사 김정희는 누구인가?[각주:1]

이 글을 읽는 이라면 적어도 한 번 이상 추사 김정희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추사가 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요하게 언급되는지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쉽게 말하지도 못할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추사는 누구인가

그는 매우 넓게, 그리고 깊게 당대 학문과 예술의 세계를 아우르고 있었다. ‘학예일치의 경지에 이른 이상적인 선비의 표본으로 그를 지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시와 문장의 대가였고, 또한 문인화의 대가였으며, 실학(특히, 금석학과 고증학)의 대가라고도 불린다. 그를 알고 있어도 그를 알기 힘들다는 말이 이해될 것이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의 표현을 빌자면 추사는 여러모로 오르기 힘든 산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추사의 가정은 흉사가 잦았다. 여기저기서 초상이 났다. 때문에 어리광을 부려보지도 못하고 애늙은이처럼 진중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15세에 결혼을 했는데, 그쯤해서 추사는 <북학의>로 우리에게 유명한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박제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추사는 북학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이듬해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신유박해로 스승 박제가도 유배를 가게 된다. 추사가 20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하지만 추사의 부인은 요절하고 만다. 그리고 같은 해 스승도 세상을 떠난다. 추사의 주변인들이 모두 떠나고 이제 친아버지와 두 동생만이 남았다. 추사는 재혼을 하고 과거에도 급제한다. 그 후에야 꿈에 그리던 연경에 가게 된다.

연경에서 그는 스승 박제가와 인연이 있는 조강을 만나고 조강을 통해 서송을, 서송을 통해 평생 스승으로 모시는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게 된다. 추사는 그만의 박식함과 의리로 그들의 스승을 매료시킨다. 스승 외에도 그는 이정원, 서송, 조강, 주학년 등 많은 친구를 사귄다.


주학년, <추사전별도>, 북경 법원사에서 열린 추사의 송별연 장면이다. 탁상 가운데 무관의 복식을 하고 있는 이가 추사이다.(오른쪽에서 3번째)



 

왼쪽에 쓰인 글의 내용을 통해 추사가 북경에서 쌓은 인맥을 확인할 수 있다.

 

가경 경오(1810) 2월 조선 김추사선생이 장차 돌아가려고 하면서 책을 내놓고 그림을 요구했다. 바빠서 많이 지을 수는 없으나 경치를 보고 그대로 그려 한 때 멋진 모임을 기록하다. 함께 모인 자는 양주 완운대, 백강 이심암, 의황 홍개정, 남풍 담퇴재, 번우 유삼산, 대흥 옹성원, 영산 김근원, 면주 이묵장, 양주 주학년이다."

 

북경에서의 일정이 끝난 추사는 위의 송별연(전별연)에서 받은 전별시에 답하는 긴 이별시를 남긴다.


"내가 북경에 들어가서 제공들과 서로 사귀기는 했으나 시로써 계합을 다진 적은 없었다. 돌아올 무렵에 섭섭한 회포를 금할 길 없어 만필로 구호하다

[我入京與諸公相 交未曾以詩訂契 臨歸不禁悵觸 漫筆口號]"[각주:2]


본국으로 돌아온 추사는 연경의 학계와 지속적인 교류를 하며, 그곳의 고증학의 정신과 방법들을 조선에 토착화하는데 힘썼다. 그가 이루어 놓은 성과 덕분에 수많은 학예인들이 청나라의 학자들과 폭넓고 깊은 교류를 더해갈 수 있었고, 이 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우선 이상적과 같은 많은 역관들이 추사의 애제자가 되어 지속적으로 연경의 학자들과 추사가 소통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던 중 정조가 승하한 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이에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를 내세워 이를 돌파하려한다. 효명세자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로 요직을 채우는 데 여기에 김노경(추사의 아버지)이 있었다. 하지만 효명세자도 갑자기 죽어버리고 안동김씨 세력은 효명세자의 죽음과 그 책임을 문제 삼으며 계속 상소를 올리고 결국 추사의 아버지인 김노경은 남해에 있는 고금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제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배경에 대해 언급을 할 것이다. 인물이 많이 나오니 유의하길 바란다. 순조마저 세상을 뜨고 헌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순원왕후를 얼굴로 안동 김씨 세력은 여전히 실세를 잡고 있었다. 헌종을 견제하기 위해 안동 김씨는 또 다시 사건을 만들어 상소를 올린다. 그들은 순조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간 윤상도의 죄를 다시 물어야 한다고 하며 그 과정에서 김노경을 다시 끌어들였다. 순원왕후는 추자도에 유배 중이었던 윤상도를 잡아다 효명세자를 무고했다는 죄로 능지처참한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반전이 벌어진다. 허성이란 인물이 윤상도에게 상소를 종용했다는 것이고, 그 허성을 사주한 사람은 안동 김씨의 김양순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김양순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추사를 물고 늘어진다. 김양순은 윤상도의 상소문이 추사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추사는 계속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김양순은 심문을 견디다 못해 사망하고, 허성은 상소를 사주한 것과 상소문을 수정한 죄로 능지처참 당한다. 추사의 오랜 친구인 조인영은 이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헌종에 올리고 헌종은 의심은 가지만 확증이 없으므로 추사를 죽이진 않고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자는 결정을 내린다. 오랜 심문과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추사는 제주도로 가는 운명이 된다.[각주:3]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는 배경, 추사의 연경에 대한 동경과 그 덕에 생긴 이상적과의 인연을 간단하게 확인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세한도>를 감상하기 전에 유배지로서 제주도는 어떤 공간이며, 그곳에서 추사는 어떤 생활을 했는지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세한도>라는 예술이 탄생한 곳이 바로 제주도이기 때문이다.

 

제주도와 추사

제주도는 유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제주도는 섬이다. 그것도 한당시 선박 기술의 사정상 제주도로 가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죄인을 실은 배가 표류하여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전라도 관찰사나 제주 목사의 보고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장점으로는 제주도에는 관방이 설치되어 죄인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점, 죄인을 책임질 만큼의 경제적 능력이 있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가장 유배를 보낸 빈도가 높은 곳이 바로 제주도였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각주:4]

당시 제주도는 딸을 낳으면 효도를 잘 할 것이지만, 아들을 낳으면 이는 내 아이가 아니라 고래와 자라의 밥이라고 할 정도로 배를 타고 다니기 위험한 곳이었다. 그러나 추사는 운이 좋게도 날씨가 좋아 아침에 출발하여 같은 날 저녁에 도착하는 순항을 한다. 화북포구에 내림으로써 추사의 유배생활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촌 아이놈들 몰려들어 저거 보라고 소리치니

귀양다리 내 얼굴이 괴상한 점이 많아서구나

결국 백번 꺾이고 천 번 찍혀 온 곳에는

남극성만 은혜처럼 잔잔한 바다 위에 빛나는구나

추사, <제주의 화북진을 지나며>

村裏兒童聚見那 逐臣面目可憎多

終然百折千磨處 南極恩光海不波

秋史,<瀛州禾北鎭途中>

 

이후 추사는 제주성을 지나 한라산 너머에 있는 대정현에 도착한다. 대정현의 대정(大靜)이란 큰 고요함을 뜻한다.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 경치에 추사는 감탄하지만 압송관인 금오랑과 아전인 고한익은 보기와 다르게 그곳이 매우 척박한 곳이라 일러준다. 이곳에서 추사는 독서를 하고 주민들을 가르치며 9년간의 유배 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첫 번째 적거지로 정해진 곳은 송계순의 집이었는데 그곳은 가시울타리가 쳐져 있었다고 한다(위리안치). 탱자나무 등의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만드는데, 어차피 죄인이 도망가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위리형은 실제로 가두는 기능보단 그 안에 있는 죄인의 죄가 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기능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송계순의 집에서 2년을 지낸 후 추사는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과 관련하여 가시울타리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강도순의 집은 추사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고 내방객도 많았다고 한다. 이한우, 강위 등의 내방객들에 의해 이곳은 수성초당[각주:5]이라고도 불렸다. 한편, 추사는 그곳을 스스로 귤중옥이라고 했다. 추사는 귤을 우뚝 선 지조와 향기로운 덕이라 상찬하였다. 그리고 이후 식수 문제로 인해 계곡이 있는 창천리로 한 번 더 적거지를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추사의 <영영백운도>, 추사는 이집을 귤중옥이라 불렀다.



 

추사에겐 이재 권돈인과 황산 김유근이라는 절친이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초월해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관계였다. 황산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의 우정은 돌처럼 단단한 석교(石交)”였던 것이다. 그런데 추사가 유배를 떠나기 직전, 황산과 추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오해로 왕래가 끊어졌고, 오해를 풀지 못한 채 유배를 떠난 그해 겨울, 오래전부터 병석에 누워있던 황산이 끝내 사망하고 만다. 추사는 유배 생활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깊은 절망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황산이 떠난 2년 뒤, 추사의 부인까지 세상을 떠난다.

 

어떻게든 월하노인 저승 법정 세워놓고

내세에는 남편 아내 처지 바꿔 태어난 뒤

나 죽고 천리 밖에 그대 혼자 남게 하여

나의 이 슬픈 심정 그대도 알게 하리.

추사, <귀양 중에 죽은 처를 애도함>

那呼月姥訴冥司 來世夫妻易地爲

我死君生千里外 敎君知我此心悲

秋史, <配所輓妻喪>

 

한양에 있는 반대파들도 여전히 추사를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괴롭히고 있었고, 그 결과 한양에 있는 다른 친구들과의 소식도 점차 끊길 수밖에 없었다. 초의 같은 승려나 여항 지식인들만이 바다를 건너 육지와 제주를 오가며 추사와의 우정을 끝까지 지켜나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추사가 의지할 수 있는 벗은 오직 뿐이었다. 이를 이상적은 잘 알고 있었고, 그는 연경을 드나들며 구할 수 있는 최신 서적들을 추사에게 보내주었고, 그곳의 소식들을 전해주었다. 이제 김정희의 마음속에서 이미 <세한도>가 그려지고 있었을 것이다. 유배 생활을 시작한지 9년 째 되던 해에 대왕대비 육순, 왕대비 망오, 순종 추상존호, 대왕대비 가상존호, 익종 추상존호, 왕대비 가상존호라는 총 6개의 경사 때문에 추사는 석방된다. 물론 친구인 조인영이나 권돈인, 신헌, 허련, 조희룡과 같은 제자들이 헌종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큰 노력을 해주었다.[각주:6] 아래의 시는 해배되어 나갈 때 쓴 시로 여겨진다.

 

환풍정 올라 하니 망양대와 맞닿어라

굽어 보니 홍모의 돛 그림자 떠오누나

안계를 상량하면 단번에 들이킬 만

손 가운데 술잔에 해와 달은 들고 나네

추사, <환풍정>

喚風亭接望洋臺 俯見紅毛帆影來

眼界商量容一吸 兩丸出入掌中杯

秋史, <喚風亭>

 

 

제주도 유배 이야기도 끝났으니 세한도나 보자.


<세한도> 감상하기

 


추사, <세한도> 전체


 

이 하나의 그림을 보기 위해 우리는 꽤나 먼 길을 달려 왔다. 문인화는 본질적으로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작가에 대해 알 때 더욱 생산적인 감상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추사에 대해, 그의 유배생활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세한도>를 들여다보기 이전에 이 글에서 <세한도>를 감상하는 목적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그 목적에 맞는 감상 방법을 제시해보도록 하자.

서구중심사회에서 문화적 변방인 동양, 그중에서도 변방인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 작가들은 어떻게 주류 문화계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어필할 수 있을까? 오늘날 사회에서 현대미술의 중요한 기능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일 것이다.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은 한편으로, 어떠한 지배적인 헤게모니로의 획일화될 위험을 안고 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나아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책무라 할 수 있다면, 서구식 자본주의로 세계화되고 있는 현대미술계에서 변방 중에 변방에 속한 작가가 던져주는 개성 있는 시선은 분명 바람직한 방향으로 세계 미술계를, 나아가 세계의 문화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결국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언부언이지만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변방의 예술가는 중심부의 사회가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아니면 아예 그 변방을 새로운 중심부로 만들어 기존의 중심부의 한계를 대체해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예술가는 창작하는 사람이며, 창작하는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이고, 생각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결론은 <세한도>가 변방 중에 변방으로서의 한국인인 작가가 보여줄 수 있는 예술적 감수성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 감수성을 구체적인 단어로 규정짓기엔 무리가 따르나, 이 글에선 그것을 정신이라고 정의하고, 정신의 정의는 예술가로서 하여금 예술 창작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고, 정신이란 개념은 명분이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추사가 고조선 이전부터 오늘날까지의 한반도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을 대표하는 보편적인 모델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고, 그렇다고 우긴다면 정말 말 그대로 우기는 꼴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더 바람직한 삶을 위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시점에 우리가 꺼낼 수 있는, 우리만이 꺼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로는 추사가 적합하다는 것이다. 또한, 유교라는 이념자체가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기 때문에 중국과는 완벽히 차별된다고도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현대미술에서 중국의 현대미술은 유교적 감수성보단, 사회주의 속에 자본주의가 침투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 같다. 도올은 그의 책 중용, 인간의 맛의 서문에서 중국은 서구사회의 문명패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창출하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각주:7] 하지만 현실이 어떠한지는 중국미술이 잘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추사가 평생에 걸쳐 연구했던 금석학이나 추사체체라는 성취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추사의 정신을 중국의 그것으로 환원시키기엔 이미 무리가 있을 것이다.

말이 자꾸 길어지니 이만 정리하자면, 첫째 <세한도>를 통해 유교적 가치를 발견하고(특히 조선의 선비정신), 둘째 그것이 예술로 승화되었을 때 그 예술이 인간에게 어떤 가치를 갖는지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그 정신을 토대로 앞으로의 창작활동을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려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세한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추사의 정신은 무엇일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림 그 자체만으론 그것을 발견해내기가 힘이 든다. 우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림을 보는 습관인 원근법이 무시되어 있어 그림이 뭔가 어색해보이고 그 점은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시각으로 감각할 수 있는 1차적인 정보를 차치하고 화면 이면의 추상적인 감성들을 찾아가다보면 황량함’, ‘쓸쓸함정도의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다. 표면에서 발견되는 거슬리는 조형과 고독한 분위기로는 이 그림이 조선회화의 정수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추사의 생애를 훑어봐야만 했다고 앞서 언급했었다. “서화일률이라 했다. 글씨와 그림은 한 가락이므로 보는 방법도 한가지인 읽는 것이란 뜻이다.


추사, <세한도> 그림부분



 

<세한도>의 메시지는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준 이상적의 의리에 대한 고마움이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 우선시상 완당이라 쓰여 있다이는 추운 시절을 그린 그림이네(세한도), 우선(이상적)은 이것을 보게(우선시상), by. 김정희(완당)란 뜻이다.

 


추사, <세한도> 화발 부분



 

화발의 글을 보면 <세한도>를 그리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거년에 대운(大雲)만학(晩學) 두 종의 서()를 부쳐 왔고 금년에는 또 우경문편(藕耕文編)을 부쳐 왔는데 이는 다 세상에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머나먼 천만리 밖에서 여러 해를 걸려 구득(購得)한 것이며 한때의 일이 아님에 있어서리오.

더구나 온 세상의 풍조는 오직 권세이익만을 붙쫓는데 이와 같이 심력을 허비하고도 권세이익에 돌리지 아니하고 마침내 해외의 한 초췌 고고(枯槁)한 사람에게 돌리기를 마치 세상이 권세이익에 붙쫓는 것과 같이 하니 어인 일인지요.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권세이익으로 어울리는 자는 권세나 이익이 다 떨어지면 사귐이 성글어진다.” 하였는데 그대 역시 세상의 풍조 속에 한 사람으로서 초연히 스스로 권세이익의 테두리 밖에 벗어나서 권세이익을 가지고 나를 보지 않는 것인지요.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지요.

공자(孔子) 말씀에 세한을 만난 연후에야 송백(松柏)의 후조(後凋)를 알게 된다.”라 하였는데 송백은 바로 사시를 일관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고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인데 성인은 특히 세한 이후를 들어 칭하지 않았소.

지금 그대는 나에 대해 이전이라서 더함도 없고 이후라서 덜함도 없지 않았소.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할 게 없다면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소.

성인이 특별히 칭한 것은 한갓 후조의 곧은 지조, 굳센 절개를 위함뿐만 아니라 역시 세한의 때에 감발(感發)된 바 있어서인 것이외다.

! 서한(西漢)의 순후한 세상에 급암(汲黯)정당시(鄭當時) 같은 어진 이로도 빈객(賓客)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곤 하였으며 하규(下邽) 사람이 문에 방을 써서 건 일 같은 것은 박절함이 너무도 극단적이었으니 슬픈 일인지고.[각주:8]

 

쉽게 말하자면, 추위가 닥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계속 푸름을 깨달았다는 것, 세상 사람들은 이득이 있으면 붙고 단물이 빠지면 떠나는데 항상 곁에 있어준 우선이 고맙다는 것이다. 그런 추사의 마음이 온전히 우선에게 전달되었고 우선은 이렇게 답한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려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어찌 이렇게 분에 넘친 칭찬을 하셨으며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이권을 좇지 않고 초연히 세상의 풍조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보잘것없는 제 마음이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그런 것입니다. 더욱 이런 책은 마치 문신을 새긴 야만인이 선비들의 모자를 쓴 것만 같아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정치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저절로 청량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서 장황을 한 다음 친구들에게 구경시키고 제영을 부탁할까 합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이 그림을 구경한 삶들이 제가 정말로 속물에서 벗어나 권세와 이권 밖에서 초연하다고 오해할까 하는 것입니다.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당치 않은 일입니다."[각주:9]

 

세한도의 오른쪽 아래에 찍힌 도장엔 ()()()()이라 쓰여 있다. 아마 이상적이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바로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기를!을 의미한다.[각주:10]

이러한 추사의 정신이 시대를 초월해 우리에게까지 공명하기 때문에 소나무, 잣나무, 갈필 등의 형식적인 요소들에 학자들이 미학적, 혹은 예술사적 미사여구를 부여할 때 무리 없이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싶다.

 

현대 속에서의 <세한도>

나는 대학에 갓 입학하여 수묵화 수업을 통해 <세한도>를 둘러싼 추사와 우선의 사연을 처음 접하게 되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역사에 남는 걸작을 그려낸 추사보단 감동을 받은 우선에 입장에 더욱 관심이 갔다. <세한도>를 처음 본 우선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우선은 눈물이 흐른다고 편지에 썼지만, 내가 만약 우선이었다면 눈물이 흐른 정도가 아니라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을 것만 같았다.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점, 그가 그 믿음을 알아준다는 점이 나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나는 그런 사람인가? 내가 그런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다행히도 내 곁엔 그런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결론에는 도달할 수 있었. 대다수의 사람들이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사회에서 내가 가진 것이라곤 인복뿐이라는, 거기선 빚도 재산이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세한도>를 통해 발견한 역설이었다.

고전“Old"한 것이 아닌 ”Classic"한 것이 되는 것은 그것이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경우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세한도>에 공명하였기 때문에 <세한도>가 최고의 문인화라는 점에서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박철상은 그의 책 세한도에서 이렇게 평한다.

 

<세한도>에 담긴 정신이 추사 한 사람만의 감회가 아니라, 조선의 모든 선비들의 정신이자 지금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정신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추사는 <세한도>를 통해 바로 이 조선의 정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한 장의 그림이 아닌, 학문과 예술이 하나 되는 경지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한 시대에 충실하여 그 때의 감정이 절절히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방식으로 <세한도>는 시공간을 초월하며 여전히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인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사회를 이루며 사는 동물인 우리에게 오늘날 결핍되어 있는 신의라는 가치의 교훈을 준다는 점, 다시 말해,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우리의 인생에서 살다 죽는 것 다음으로 본질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매우 보편성을 지니는 작품으로서 작용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 죽는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사회 속에서 관계의 맺고 끊음을 반복하며 사는 것이다.

 

결론

오늘날 작업을 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소통이라는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하는 것이 이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통을 위한 매우 기본적인 전제는 바로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대부분의 작가는 내용이나 형식에서 찾으려 한다. 앞서서 예술은 특수성을 가지고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모든 작가들의 작업의 내용과 형식은 저마다 다르다. 그들의 자존심상 그것들이 같아선 안 되고, 저마다의 경험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같을 수도 없다. 이는 내용과 형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단 의미이다. 보편적인 것은 전혀 신경쓰지 못하고 내용과 형식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작품이 공허하고 작가 스스로가 요구하는 소통의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 것이다. 왜 수많은 스타작가들이 뜨고 지는 것일까. 왜 수많은 아트페어와 비엔날레가 열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현대미술을 보고 그것도 예술이냐고 비아냥거리는 것일까.

참신하고 개성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현대미술이 예술사적으로 힘을 갖게 해주는 요소였고, 나아가 그것의 존재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뒤샹이 변기를 갤러리에 놓은 것과 앤디워홀이 대중적 이미지들을 캔버스로 옮긴 것, 그리고 백남준이 TV를 갤러리에 놓은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만이 다를 뿐이지, 우리의 생활 속에 있는 것들을 예술 세계로 끌어들여온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이 창작되지만 그것이 창작되는 과정은 이미 관습화되어있기 때문에 신선한 경험을 주기엔 이미 그 힘이 다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내용과 형식에 집착해선 안 된다. 내용과 형식에 몰두해 창작된 작품은 진정성이 담기지 못할뿐더러 작가 스스로도 불만족스럽고 피로를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다른 매체나 소재를 찾는 것을 대안으로 하는 어리석은 딜레마에 빠진다. 내용과 형식은 다행히도 우리가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개성적이다. 다만 그것들에 선행하는 보편적인 것이 무엇인지 작가들은 깨달아야하며 그럴 때 소통이 가능한 예술이 창작될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오늘날까지의 미술은 일상적인 것들을 예술세계로 끌어들여오는 과정이었다면내일부터의 예술은 예술세계의 것들을 일상 속으로 침투시키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그것이 예술의 주체인 인간과 예술이 소통하는 바람직한 방식일 것이다

그 보편성을 우리는 정신명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변기가 갤러리에 전시될 수 있었던 것도, 유화물감이 발명된 것도, 김홍도와 신윤복이 풍속화를 그렸던 것도 모두 어떠한 정신이 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미술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베토벤은 유명한 신고전주의 작곡가이다. 고전주의가 추구하는 예술을 달성하기 위해선 형식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는 그 형식을 과감히 깨버린다. 교향곡에 합창을 넣음으로써 말이다. 그 교향곡을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이라 평가하고 사랑하고 있다.

머리 아픈 이야기는 이제 멈추고다시 <세한도>를 보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세한도>에는 인간이 담겨있다예술의 본질을 넘어서 인간의 본질까지 담고 있는 것이다. <세한도>라는 한 장의 그림에는 내가 이 글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다바로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예술은 무엇이고인간은 예술을 어떻게 창작하고 예술은 인간에게 어떤 기능을 하는지“ 말이다정신창작을 뛰어넘어 창조를 가능케 한다. 보편을 위해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갖는 한계에 저항할 힘과 명분을 준다. 스테판 에셀은 그의 저서 분노하라에서 창조는 저항이며 저항은 곧 창조라 역설하였다. 모든 문화적인 산물은 인간을 그 목적으로 한다. 쉽게 말해 차도는 차가 달리기 위한 길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도와 차도를 분리함으로써 인간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컵은 음료를 담는 것이지만 사실, 음료를 인간으로 하여금 쉽게 마시게 하기 위함이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의 주체가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예술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 그래야만 가치가 있다. 예술가가 인간을 위한 예술을 창작하고자 할 때, 다시 말해 정신을 획득했을 때, 기존의 문화가 만들어놓은 기형적인 틀에 저항하게 되고, 창조하게 되고, 결국엔 예술의 목표를 달성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박철상, 세한도, 문학동네, 2010. ㅡ강추!

양진건, 제주 유배길에서 추사를 만나다, 푸른역사, 2011.

오주석,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v.1, , 1999.

유홍준, 완당평전, 학고재, 2005.

이상각, 조선역관열전, 서해문집, 2011.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1. 김정희의 소개 글은 박철상의 『세한도』(문학동네, 2010)와 유홍준의 『완당평전』(학고재, 2005)을 위주로 글의 전개상 필요한 부분을 중심으로 요약하여 전개한다. 참고로 박철상 선생은 전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추사 연구에 있어선 엄청나게 많은 업적을 남기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업이 은행원이었던가... 그는 <완당평전>에서 유홍준 선생이 잘못 고증한 부분이 있다며, 수 없이 많은 오류를 지적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2. 지면상, 그리고 이야기 전개상 본문에 싣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여기에 소개한다. 한국종합고전DB에서 완당전집 9권으로 검색 후 시 카테고리에 “내가 북경에 들어가서 제공들과 서로 사귀기는 했으나 시로써 계합을 다진 적은 없었다. 돌아올 무렵에 섭섭한 회포를 금할 길 없어 만필로 구호하다[我入京與諸公相 交未曾以詩訂契 臨歸不禁悵觸 漫筆口號]”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h011&gunchaId=av009&muncheId=01&finId=062&NodeId=&setid=4033065&Pos=0&TotalCount=1&searchUrl=ok [본문으로]
  3. 김정희의 유배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박철상, 『세한도』(문학동네, 2010), pp. 41-66. [본문으로]
  4. 양진건, 『제주 유배길에서 추사를 만나다』(푸른역사, 2011), pp. 55-57. [본문으로]
  5. 수성에 대한 이야기. “수성은 남쪽의 수평선 근처에서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는 별이다. 예로부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왕이 그 별을 향해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수성이 보이는 해에는 나라가 평안해진다고 믿었다. 수성초당은 그러한 귀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양진건, 『제주 유배길에서 추사를 만나다』(푸른역사, 2011), p. 77. [본문으로]
  6. 추사의 제주 유배 생활을 이해하는 데엔 큰 도움을 주나, 글의 전개 상 사족이 될 것 같아서 본문에 첨부한 시를 제외한, 그가 남긴 많은 한시와 편지글들을 생략한다. 아래 책에 그것들이 쉽게 잘 정리되어 있다. 양진건, 『제주 유배길에서 추사를 만나다』(푸른역사, 2011), pp. 173-243. 을 참고. [본문으로]
  7. 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통나무, 2011), p. 28. [본문으로]
  8. 한국고전종합DB에 있는 해석본. <기오(其五)>라는 제목을 클릭하면 뜬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h011&gunchaId=av004&muncheId=01&finId=083&NodeId=&setid=1763182&Pos=0&TotalCount=1&searchUrl=ok, [본문으로]
  9. 이상각, 『조선역관열전』(서해문집, 2011), p. 237. [본문으로]
  10. 오주석,『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v.1』(솔, 1999) p. 139.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