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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talked

한동대, 기독교인의 대학인가? 포항시민의 대학인가?

by AKHWEE 2014. 4. 3.

http://blog.daum.net/staff21/12855777


한동대, 기독교인의 대학인가? 포항시민의 대학인가?

한동대 설립 과정과 사건 전개 과정을 중심으로


‘역사’를 통한 ‘상황’ 보기


한동대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95년 개교 이후 김영길 총장이 6년 동안 무려 76번이나 법정에 출두해야 했을 만큼 복잡하다. 이번 법정구속은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진실을 파악할 수 있게된다. 현재 언론과 인터넷 게시판에는 상황을 파악할 만한 객관적인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인 정보가 난무하고 있으며, 각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이끌기 위한 편협한 내용의 글과 집단 행동이 진행되고 있다. 결국 ‘시대’ 즉, ‘상황’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과정’ 즉, ‘역사’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몇 십 년의 세월과 복잡한 전개과정을 모두 기록할 수는 없으나 올바른 ‘역사이해’ 속에서 정확한 ‘상황인식’을 돕기 위해 한동대와 포항시민단체에서 제공한 자료들을 근거로 기록해 본다.


한동대는 포항시민의 염원으로 세운 대학


한동대 설립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재단을 만들어 기독교 대학을 세운 것이 아니다. 포항에서는 인구 10만이던 70년대부터 지역대학설립의 염원이 시작되어 마침내 현동학원(한동대)을 인가 받기까지 많은 지역인사들의 수고가 있었다. 70년대 초 전문대만 있던 포항에 포항수산대 하태환 학장이 처음 졸업식사를 통해 4년제 대학 유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후 82년에 와서 포항지역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포항지역개발촉진위원회’를 구성하고 ‘4년제 대학 유치 시민대회 개최 및 가두서명 개시’했는데 이 서명운동은 92년 한동대가 인가 받을 때까지 무려 11만 6천 명의 포항시민이 참여했다.(포항시민이 현재 50만임을 감안하면 대다수의 포항 성인들은 모두 서명했다고 보아도 됨) 85년에는 박태준씨를 추진위원장으로 하는 ‘포항공대 건설본부’가 발족되었고 많은 지역인사가 참여하고 있어 포항시민들의 4년대 대학설립 꿈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 기대가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86년 막상 인가된 포항공대는 4년제 종합대학이 아닌 공대 중심으로 정원 240명의 특성화 대학이었다. 포항시민들의 참여에 비해 포항지역사회에 주는 혜택은 미비했던 것이다. 포항공대 학장은 김영길 총장의 친형인 고 김호길씨였다.


포항시민들은 이에 좌절하지 않았고 89년 ‘포항지역사회연구소’가 발표한 “포항지역발전을 위한 4년제 대학 설립의 타당성과 그 추진방안에 관한 연구”를 계기로 90년 김호길 포항공대 학장, 조광제 포사연 연구위원 등이 참석해 ‘포사연 4년제 대학설립을 위한 시민대토론회’를 개최하고 이후 ‘포항지역 4년제 대학설립추진위’(이하 추진위)를 구성하였다. 당시 추진위원장은 지역인사인 박경호씨가 맡고, 자문위원장은 박태준씨, 자문위원에 이진우씨 등 지역 국회의원 출신과 김호길 포항공대 학장 등이 참여했다. 


추진위의 활동으로 91년에 드디어 지역 사업자인 유봉산업 송태헌씨가 사재 320억 원을 지원해 흥해읍 남송리(현 한동대 부지)에 23만평의 땅을 매입하고 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드디어 92. 8. 14 교육부에서 대학설립계획이 인가되었다. 추진위는 이후 학교법인 현동학원(‘현동’은 송태헌씨의 ‘호’이다)을 설립하고 송태헌 설립자가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현동학원 재단은 초대 총장으로 김영길 박사를 내정하였고 김박사는 94년 4월 부임하였다. 한동대학교는 94년 12. 2.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95. 2. 1.에 김영길 박사가 초대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영남일보 94. 9. 15의 김영길 총장 인터뷰에 의하면 당시 김총장은 “한동대학이 지역민의 소망으로 탄생한 만큼 신입생의 30%는 포항과 동해안지역에서 뽑고, 50%는 대국, 경북지역에서 유치하겠다. 그리고 지역 학생들을 위한 인센티브를 고려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갈등의 시작, 하용조 목사 이사장 취임과 고소․고발의 역사


순조롭게 진행되던 상황은 95년 송태헌 이사장의 유봉산업이 94년 겨울에 내린 폭설로 인해 사업에 차질을 빚으면서 자금난에 봉착하게 되었고, 송이사장은 95. 6.에 선린병원과 합병하고 선린병원 김종원 원장에게 이사장직을 넘겨주었다. 이때 송태헌씨가 한 이임사를 보면 ‘지역민의 염원에 의해 세워진 한동대는 포항 지역 특성에 맞는 산업인력 양성 및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고, 앞으로 본인의 대학설립 이념을 승계해서 대학을 발전시켜줄 수 있는 분에게 조건 없이 학교경영권을 이양하기로 결심하고, 선린병원 김종원 장로님을 이사장으로 모시고 이태우 전 대학설립본부장께서 학교법인과 대학운영 책임지고 맡아서 해주신다는 조건으로 양 법인간의 합병을 흔쾌히 수락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태우씨는 학교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송태헌 설립자는 95. 10. 4 김종헌 이사장에게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다고 재단을 원상복구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김종헌 이사장은 10월말 경까지 이사회를 소집회 의결사항을 전달하겠다고 하고는 돌연 11. 3.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에게 이사장직을 이양한다고 발표하였다.


하용조 목사는 이사장에 취임 전부터 한동대학은 ‘평신도 선교사 양성대학’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하였고 제3대 이사장 취임 후에는 처장급 지역인사 몇 명을 해임하고 과장 이상에 일괄 사표 제출을 요구해 교직원의 반발을 샀다. 이후 모든 직책은 온누리교회 인사로 채워졌는데 99. 8 대학본부 조직표를 보면 8개 실, 처장급 임원 중 7개가 온누리교회 장로들로 채워졌고 1명은 하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창조과학회 회원으로 채워졌다.(현재는 많이 조정되었는데 현재 자료는 입수 못함) 하목사는 ‘한동대는 기독교대학, 선교사 양성 대학으로 운영할 것이니 이를 반대하는 교수나 교직원은 학교를 떠나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하목사는 이후 18개 교양 과목 중 8개를 기독교 관련 과목으로 바꾸면서 자신이 말한 ’평신도 선교사 양성 대학‘의 틀을 만들었다. 


물론 이에 대해 지역인사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특히, 대학설립기획자였던 교양학부 조광제 교수는 공개적으로 반대하다 해임되었다가 복직되었고 96년에 결국 제명 조치되었다. 지역인사들의 반발 속에서 한동대는 기독교대학으로 확실한 자리 매김을 추진하는데 96년도 신입생 모집 설명회는 대도시 중심으로 14회를 개최하면서 모두 대형교회에서 진행하였다. 결과는 571명의 신입생 중 포항지역 학생 수는 7명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70% 이상은 기독교인이다. 지역언론은 진행, 홍보상의 기독교, 지역 편향에 대해 문제 제기했다. 그러나 당시 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내에서는 장소를 빌려주지 않았고 포항시내 고등학교들은 실력있는 학생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기를 바래 설명회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한동대는 전국 상위 6%대의 학생들이 입학하였다)


당시 하목사는 이사회 의결과 관계 당국의 사전 허가 없이 대학운영비를 차입하는 등 부당행위를 저질렀다고 ‘엄중경고’와 관련자를 문책하라고 경고조치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96. 2.에는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대표: 한완상, 이세중)으로부터 하용조 이사장과 김영길 총장은 학내비리와 관련 서울지방검찰청에 고발되었고 이때 약 20개 시민단체가 비난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고발로 하목사는 벌금 500만원, 김총장은 벌금 100만원의 실형을 받았다. 96. 3. 5에는 온누리교회 제184회 당회에서 온누리교회가 한동대를 인수한다고 결의하였다. (당시 온누리교회가 한동대에 지원한 재정은 약 90여억으로 알려져 있다)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 지역인사들과의 대립은 이후 수 많은 고소․고발로 이어지는데 96. 3.에는 포항시로부터 한동대 내 건축물에 대한 실태조사를 받고 건축법위반으로 고발 및 행정처분 받았다. 당시 한동대는 학생회관 2층의 서클룸 16개 중 14개를 칸막이 설치해 25개의 기숙사로 무단용도 변경하여 사용하고, 신축중인 기숙사 7동 건축허가 전부터 공사에 들어가 70% 공정 후 허가 신청하였다. 설상가상으로 3월부터는 노동조합이 전면 파업에 돌입했는데 당시 노조는 “1. 29. 파업이 결정되었으나 신입생 입학 등 학사 일정에 차질 없도록 유보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신입생이 들어온 이후에는 신입생 업무를 방해하는 등 업무방해가 심했다. 그리고 노조에는 송태헌씨의 친인척들이 들어있어 핵심적인 일들을 진행했다. 이후 파업은 9개월간 지속되었다. 


노조는 95. 11. 이후 28차례 협상 중 김영길 총장이 단 1차례도 협상에 임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신분보장, 종교의 자유, 임금인상 등을 주장하였다. 노조의 파업에 맞서 한동대가 택한 방법은 직장폐쇄 단행과 노조위원장과 5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하는 것이었다. (96. 4. 13) 이 조치는 이후 8개월간 지속되었다. 이후 노조도 김영길 총장과 김영인 사무처장, 윤인길 총무과장을 근로기준법 위반 및 부당해고 혐의로 노동부에 고소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노조와의 고소․고발은 끊이지를 않는다. 이로 인해 김영길 총장은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한정추와 시민연대 결성 통해 본격적인 운동전개


96. 4. 지역의 유지들과 시민단체들은 ‘한동대 재단정상화추진위원회’(이하 한정추)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정추는 당시 포항시의회 의원 43명 중 41명이 참여하는 등- 현재는 많은 의원들이 가입하고 있지 않다. 정확한 인원은 확인 못함 - 포항지역 유지들 과 이후 만들어지는 ‘한동대 우리대학만들기 시민연대’(이하 시민연대) 결성으로 상당수의 시민단체가 참여하고있다. 송태헌 설립자는 한동대를 돌려 받으면 포항지역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한정추에 각서를 제출하며 싸움을 부추겼다. 


아쉽게도 96. 5. 9일 열리기로 한 한정추와 한동대 이사장, 총장, 선린재단 이사장과의 면담은 한동대 측과 선린재단 측 불참으로 무산되고 이후 한정추는 청와대와 교육부에 진정서를 제출 한 후 시민대회로 돌입하였다. 96. 5. 23에는 포항시 의회가 한동대 사태와 관련해 7개항 결의문을 채택하였는데 주용 내용은 학생정원 축소 반대/야간대학 개설/특정구역(교회)중심 홍보 활동 개선/설립자 건학 이념 반영/포항시민의 대학 인정/지역출신 교수나 교직원 배제 반대/지역인사 참여하는 이사진 구성이다.


이렇게 학교가 내외적인 어려움에 있는 가운데 재정적 부담 능력이 거의 없는 이영덕 장로(전 국무총리, 당시 한국정신문화원장)가 제3대 이사장으로 96. 8. 9 취임한다. 취임식 때 한동대는 포항시내 대부분의 기관, 단체에 초청장을 보냈고, 한정추와 노조는 참석을 물리적으로 막았다. 결국 지역인사는 10여 명만 참석했다. 이는 개교 때 대부분이 참석했던 것에 비교하면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96. 7. 2.에는 대구지법에 송태헌 설립자가 한동대 재단을 상대로 재단반환청구 민사소송을 제기하였고 이 재판은 2년 10개월 만인 99. 4. 1에 첫 판결이 나서 1심에서 기각되고 송씨 측이 항소해 현재 고법을 거쳐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사실 이 판결이 임박해 있어 이번 법정구속이 이 재판에 미칠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불성실한 재판 진행과 몇 가지 해프닝


한동대는 96년 학내 분규 속에서도 교육부가 선정한 ‘교육개혁추진 우수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