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ords/written

'부당'을 '불편'으로 바꾸는 '불안'

by AKHWEE 2014. 12. 31.

      12월 5일 마지막 강연자로 나오신 홍성욱 교수님께서는 연구∙학문 윤리의 사각지대의 상황들에 대한 소개를 해주셨다. 특히 연구실 내의 문제, 예를 들어 TA나 연구실 직원들의 임금문제와 authorship에 관한 이슈들을 사례로 많이 들어주셨었는데, 이것은 다른 논문조작 등의 학문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와는 달리, 매우 일상적이고 일반적으로 행해진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authorship에 관한 문제를 쉽게 말하자면 이와 같다. 논문의 저자가 아닌 사람이 저자가 되고, 논문의 실제 저자가 누락되거나 순위에서 밀려난 채 발행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임금과 관련된 문제는 급여 측면에서 다른 인턴 근무와 비슷한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하지만, 교수가 자신의 특수한 위치를 이용해 대학원생들을 부당하게 착취하는 경우를 말한다. 문제는 이 문제들이 논문 조작 등의 문제처럼 “비윤리적”이라는 점에 모두가 동의하지만, 논문 조작 같은 문제와는 달리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책임자는 처벌을 포함하여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소위 ‘학계’라 불리는 이 연구 사회가 매우 좁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부당함”들을 그 ‘세계’에 남기 위해 감수해야 할 “불편함”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른 소리를 했다가 미운털이 박히면? 그래서 어느 연구소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면?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이 바로 뒤따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부당함에 대한 문제 제기는 언제나 소수의 몫이었던 것이다. 꼭 과학 연구와 관련해서만 이런 문제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 성악과의 교수가 카톡으로 여제자들에게 성희롱을 했던 적이 있는데, 성악과 학생들은 오히려 마스크를 쓰고 복도에 나와 징계 반대를 주장하는 침묵시위를 했었다. 그 교수가 없으면 자신들의 앞날이 막막해진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최근에도 교수-제자 간의 성추행은 너무나도 만연하다(물론 모든 성범죄는 권력관계를 악용하는 것으로서 학계뿐만의 문제가 아니다). 논문의 저자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임과 동시에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인 사람의 낙하산 채용 사건, 베스트 셀러였던 《아프니까 청춘이다》, 군대의 안팎을 둘러싼 각종 비리들… 사람과 장소, 사건의 내용이 다 다르지만 이 모든 이슈들을 관통하는 문제는 같다. 우리가 ‘불편함’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부당함’이 그것의 핵심이다. 또한 그것은 그 불편함을 강요하고 정당화하는 ‘갑’들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것에 동조하거나 순응하는 무기력한 ‘을’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부당함들이 불편함으로 둔갑할 수 있었던 까닭은 개개인이 속한 집단에서 탈락∙누락∙배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아를 확장하기’를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경계를 더 확장해야만 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특정 집단의 구성원—과학자, 예술가 등—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면 우리는 훨씬 더 설득력있고 말 그대로 보편타당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적인 합의로써 제정된 최저임금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가 과학자이든 예술가이든 상관없이 부당한 것이다. 그리고 특수한 계층을 위한 법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드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사각지대를 만들어내는지 우리는 기초수급이나 무상급식의 사례에서 경험하고 있다.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선 그 제도의 대상을 구분할 기준이 필요하다. 똑같이 가난해도 법적으론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계속 생기는 것이다. 법이 충분히 정교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사람의 생활 수준이 올라가는 것이 오히려 비용이나 목적의 수행 면에서 더 현실적인 정답이다. 이것은 전체주의적인 관점에서의 개성이 거세된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통이 단절되고 파편화되는 것을 경계하는 입장에서, 우리가 처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의 공통점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하나의 연대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특정 집단으로 규정 지어 져버리고 파편화되어버린 개개인 간의 맥락을 찾게 된다면, 우리는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숨 쉬듯이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오히려 부당한 것의 부당함을 역설하기 위해 조그만 불편함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인류의 역사는 자유의 경계선을 조금씩 확장해나가는 역사라고 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부당함을 개선해왔던 의미 있는 변화의 역사가 더디게나마 진행되어 올 수 있었던 것엔 언론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는 자유의 한 갈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당함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자유는 자유의 본질 그 자체이거나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가장 큰 가능성이 있는 공간은 인터넷 속에 있다. 물론 댓글 한 줄이나 140자의 짧은 문장들이 우리의 삶을 크게 바꾸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 삶의 현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키우고, 목소리로 낼 수 있는 여론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20세기 초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유럽의 노동자들의 힘을 한 데 모을 수 있었던 협동조합과 노동회의소가 있었다면, 21세기에 그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여전히 인터넷의 가능성은 희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