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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written

작년 말에 쓴 글

by AKHWEE 2015. 3. 27.

     쟝 보드리아르는 한 사회의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물질적인 생산 수단이나 상품이 아니라, ‘이미지’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면에서 ‘생산된’ 이미지라는 것은 한 사회의 시각문화의 일부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문화를 규정지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이 특정 이미지의 유통에 개입을 하고 그것을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오늘날의 경우엔 매체가 충분히 발달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미지의 생산자가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이미지 생산자의 역할을 해왔던 ‘예술가’들의 위치는 이 사회의 어딘가에 위치할 수 있을까?


     우리가 놓인 환경에서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생산된 이미지이다. 이미지 생산자에 의해 한번 해석되어 제시되는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

가 받아들이는 각가지의 감각적인 정보들을 소화해낼 여유도 없이 수용하게 된다. 다시 말해, 어떠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어떠한 관점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관점이 충분히 다양하지 못해 우리의 사고가 편향된 방향으로 유도된다거나, 그러한 관점들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여유가 보장되지 못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누구나에게 마땅히 보장되어야만하는 자유로운 삶을 침해하고, 박탈할지도 모른다. 한 입장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는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보장 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 표현의 자유란 모든 자유로운 사고의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상에 대한 주체적인 접근과 해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다중의 일상적인 차원에서 그러한 사고에는 여전히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그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까닭에 많은 이들은 퇴근 후 아무 생각 없이 TV앞에 앉거나 컴퓨터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핸리 포드나 프레더릭 테일러는 생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된 공장 생산라

인을 제시했다. 시야를 좀 더 크게 확장하면 직업이라는 범주로서 다양한 인간을 구분하는 것도 이와 같은 목적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농부는 농사만 짓고, 건축가는 건물만 짓고, 요리사는 요리만 하면서도 그 일 밖의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개개인의 사사로운 욕심 때문이라기보단, 서로의 직업의 필요성에 대해 합의를 하고, 그들의 생산품들을 신뢰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사회가 예술학교를 짓고, 예술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육성해내려하고, 실제로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존재한다면(물론 모든 예술가들이 전업작가이지만은 않다), 그 사회는 그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예술품’의 수요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을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한 사회 속의 예술가는 작가 스스로가 농사를 짓거나 집을 짓지 않더라도, 예술작업만 계속 해도 그 행위의 정당성이 인정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회가 예술가에게 기대하는 예술작업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던 오늘날의 이미지 환경과 관련지어 생각해 간단히 말하자면, 한 대상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상은 단순히 사과나 콜라병같은 오브제일 수도 있지만, 특정 사건이나 이념 등의 훨씬 추상적인 것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예술가들이 보여 주었다.


     나도 전공으로 미술창작 관련 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정하면서, 이것을 내 전공으로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많은 고민을 해왔다. 그때그때 말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여전히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기준인 예술을 통해 내가 속한 공동체-사회에 기여하자는 기본적인 입장은 변함이 없다. 예술이라는 것의 가치를 입증하는 데 누군가의 입이나 글을 통해야만 한다면, 예술을 하는 것은 과연 예술가인지 그 누군가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막연히 뭔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것은 사실 예술작업을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하나마나한 얘기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업에설득력을 갖기 위해선 좀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사회와 소통하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작년 겨울에 터졌던 <공장미술제>와 관련한 신진작가와 아트 디렉터 간의 갈등이나 갤러리 내에서의 인턴 착취 구조같은 것들을 보면, 과연 창작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래서 나온 대안이 라는 것이 ‘예술인복지법’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예술인복지법이라는 특별법은 두 가지의 지점에서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첫째는, 노동을 하지도 않으면서 ‘예술활동’을 한다는 특권만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냐는 것이다. 이는 상당 부분 부유한 집안의 자재들이 예술을 한다는 등의 편견에서 비롯되었지만, 소통의 부재의 책임은 쌍방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둘째는, 거의 모든 복지법들이 갖고 있는 대상 선별에서의 문제가 있다. 제도적인 지원을 위해 예술가와 예술가가 아닌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제도적인 기준이 필요한데, 이것과 현실적인 상황이 일치하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내 지인 중 한 분도 예술인 등록을 시도했다가 거절당했다. 선을 긋고 여기까지만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일이긴 하지만, 이 문제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은 항상 개정이 되어야만 한다. 차라리 보편적 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런 자질구레한 조건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예술인복지법이라는 ‘법’이라는 방식에 집중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전혀 예술가 답지 못한 태도이다. 문제 해결의 수단이라고 기존에 제시되어 있는 방법을 이름만 바꿔서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현실 속에 존재하는 수단들을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나, 그런 현실에 무기력하게 흡수되어 적응해버리는 것은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지원비를 내면서 인턴을 하는 갤러리 직원이나, 자신의 창작조건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 위협받는 환경에 있는 예술가 개인들이 보여주는 지금의 모습은 예술의 종말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전시를 만들어주는 누군가에 기대서 기회만 받아먹는 것보다 더 적극적이고 새로운 방식을 찾아서 사회와 소통하려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작업하는 주제는 우리가 환경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해 인식의 대상에서 생략시키거나 배제해버리는 것들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일반적인 것, 보편적인 것이 되어 그 중요성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들을 지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사고가 도약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태도가 모더니즘적이라고, 심지어 폭력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 뿐만 아니라, 한 사회가, 그 문화가 지향해야 하는 방향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에게 그것은 모든 종류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되는 세상이다. 그곳에서 예술이 배제해야 하는 가치는 ‘배제’ 그 자체인 것이다. 예술가는 그 사회를 만들기 위한 벽돌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모든 다양함이 서로 공존하며 그 특수함이 한 사회의 보편적인 특징이 될 수 있을 때, 그럴 정도로 충분히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할 때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