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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talked

박노자 <하얀 가면의 제국> 中

by AKHWEE 2014. 6. 24.

옛날에 메모해 놓은 것들인데 페이지는 적어놓지 않았었네요. 순서도 뒤죽박죽임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이다. 사보다 공이 앞서야 한다는 공산당 선전원의 지루한 강연을 듣던 한 젊은 병사는 갑자기 그 자리에서 '사생활도 없는 이 세상에서 나는 죽어서라도 공동묘지가 아닌 개인묘지에 묻히고 싶다'고 말한다. 사상이 불온한 그 젊은 동무에게 사람들은 설득을 해보지만 군사재판소는 그에게 사형을 내려 총살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총살을 집행한 뒤 그 시체를 어떻게 묻어야 하는지 격론이 벌어졌다. '배반죄'로 총살당한 놈의 주검을 영웅적으로 전사한 동무들의 유해와 함께 공동묘지에 묻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개인묘지를 만들면 그가 원했던 대로가 아닌가? 결국 그의 시체는 상부에 전달되었고 거기에서 어떻게 처리됐는지 우리가 알 바도 아니다. 

 이 내용은 현재 팔순을 넘긴 현대 러시아의 자유사상가이자 작가인 알렉산드로 지노비예프의 한 저서에 담긴 것이다. 그런데 지노비예프의 운명은 그 젊은 병사와 비슷한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그는 그 젊은 병사처럼 개인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편안한 '개인묘지-예컨데 '개인주의'를 내세우는 서구사회-에 안주할 사람도 아니다. 그가 보는 서구 사회는 '촌스러운 전체주의의 소련'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문명적인 타협주의와 기회주의'의 지옥이다. 그의 좌우명-'나는 주권 국가다'-이 이야기 해주는 듯, 그는 체질상 어느 체제나 사회에도 구성원으로 끼어들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

 그는 정치적인 독재를 특징으로 하는 소련의 '거시 담론'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아부.복종,영합 중심의 그 '미시적 권력'까지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사회학자로서 그는 독립적 자아의 포기와 미시적 집단과의 무난한 공존, 미시적 아부와 복종을 거대한 병영국가 체제를 뒷받침해주는 가장 중요한 장치로 평가했다. (.....)

 미시적 집단(패거리)을 기본 단위로 하는 병영국가에서 국가의 억압,통제 기능의 상당부분이 구성집단에 이양됐다는 것이 소련 체제에 대한 그의 이해의 기초이다. 미시적 집단이 체제에 잠재적인 위협이 되는 비범한 인간들을 평범하고 무방한 수준으로 끌어내림으로 인해서 체제 전체는 그만큼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노비예프는 그 안정성의 이면에 있는 위기의 불가피성을 꿰뚫어본다. 미시 집단과 타협을 가장 잘하는 둥글둥글한, 개성이 없는 사람들일수록 출세가 잘되는 사회는 궁극적으로 장래가 밝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미시적 타협주의,권위주의의 절대화가 사회 발전의 가능성을 완전히 가로막는다는 그의 이론을 현재 우리 남북한 사회의 분석에 적용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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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엔탈리즘의 고전적인 패턴대로 '후진국'들은 불변하고 전근대적이고 정체되고 위험하고 불안한 곳, 늘 문제들만 산적한 곳으로 그려지는 반면, 긍정적 옥시덴탈리즘의 법칙대로 서구나 미국은 역동적이고 초근대적이고 편리한 곳, 후진국의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역사의 주체로 묘사된다. 인도나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기자들의 취재 대상은 '고대의 전통'이나 '원시림' '오지'의 기이한 '부족'들인 반면에 서구나 미국에서의 추재 대상은 대학교·병원·기업체 등 근대의 표상들이다. 한국의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 날마다 땀을 흘리는 동남아의 노동자들이 '불법체류자' '문젯거리'로 서술되는 반면 거액의 사례를 받으러 한국을 찾는 '해외(즉 미국이나 서구의) 석학'은 우리의 문젯거리까지도 다 풀어줄 수 있는 신의 대변자쯤으로 여겨진다. 세계의 현실적인 불평등은 매체의 공간에서 재생산되며 합리화·체계화된다. 한 '선진국(미국)'이 한 '후진국(북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언제나 대량 살육을 자행할 수 있는 그야말로 '위험한 곳'. 선진국의 군대가 짓밟고 있는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거에도 제국주의적 세계 질서의 희생자가 되어왔으며 앞으로도 언제 제국주의 전쟁의 희생지가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자본에 예속되고 오리엔탈리즘과 긍정적 옥시덴탈리즘을 철저하게 내면화한 미디어에게는 관심거리가 아니다. 예측 불가능한 제국주의 세계에서 내일 어떤 전쟁이 터지고 어떻게 되든 간에 오늘은 '본토인'보다 더 완벽한 하얀 가면을 쓰고 '선진적인 그들' 이상으로 '선진적으로' 흉내 내면 되는 것이다. 한국보다 영어가 대중화되어 있고 영어 교육의 효율성이 훨씬 더 높은 독일이나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마저도 생각하지 않는 '영어 공용화'를 들먹일 정도이다. 그것은 단순한 과잉 충성도 아니고 하얀 가면이 진짜 얼굴이 되기를 간절히 비는, 반성은커녕 유머 감각이나 자조 능력까지 마비된 광적인 맹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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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학생들은 대부분 전쟁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평화 지향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나부터 입대를 거부해야 정권이 전쟁 도발을 못한다는 서구 반전운동식의 확고한 입대 거부 의지를 가진 이가 별로 없었다.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산다는, 전체주의적 사회의 그릇된 상식이 대다수 응답자들에게 충분히 내면화되어 있었다. '나라'라는 상대적·현실적 구조에 '비폭력'이라는 절대적·도덕적 진리를 대립시켜 '나라'와 관련된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모두 포기할 자세를 갖추어야 비로소 '나'라는 형이상적인 존재가 성립한다는 나의 주장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원칙적으로 폭력이 비도덕적이고 비폭력이 우월하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 철학적인 문제를 놓고 '나'는 '국가'와 맞서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국가'라는 존재가 위협적이고 전지전능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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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에서 민간인에 대한 만행을 일종의'전략'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민족'과 '신성한 국방'을 들먹이는 군대가 사실상 폭력단체에 불과하다는 나의 평소 신념을 뒷받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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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신성한 맹종 학습의 의무'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군대가 양심 따위의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완전 해방된 조직사회형' 인간을 양산함으로써 파시스트적인 국가의 최대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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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타가 완전히 없어질 수 없는 이유는 군대에 대한 지배층의 실제적 요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도 나라의 운명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한국의 보수정객과 재벌들이 요구하는 인간상은 평상시에는 '상전'을 위해서라면 비자금 조성이든 세금 탈루든 필요없는 자동차 공장 계획 추진이든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충복'이고, 유사시에는 아무런 생각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동족을 쏘아 죽일 수 있는 '강인한 애국자'다. 출세를 위한 맹종을 유일한 신념으로 삼는 '인간 로봇'을 만들어달라는 것이 군대에 대한 권위주의적인 사회의 '주문'인 셈이다. 그리하여 인간 존엄성의 개념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 외부로부터의 압박에 대한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반발심 등 '불필요한 심적 현상'을 졸병의 마음에서 깨끗이 일소해 버리는 것이 군대의 주요 의무가 되는데, 이러한 '교육적 과제'를 물리적인 폭력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는 힘들다.

 대다수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자유와 존엄성을 지향하지만, 이러한 자유지향적 본능보다 신체적인 통증에 대한 기피심리가 상대적으로 더 강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면 무조건 시키는대로 해야 한다'는 반사작용을 졸병에게 강요하려면 상당한 정도의 구타가 필수적이고, 이를 개혁하겠다는 보수정권의 궤변은 기만에 불과하다. 절대 복종하는 하수인들이 꼭 필요한 거대 보수조직들(군대, 재벌 등)이 존재하는 한 구타는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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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된 중산층은 군대라는 억압적 체제와 정면 충돌하기보다는 보통 병역을 대거 기피하는 지도층을 모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자식들의 군 본무에서 특권적인 여건을 획득하려고 한다. 아이를 적어도 전방 근무에서 빼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 그 가정의 특권층 소속 여부를 판가름하는 주요 기준이 된 셈이다. '위로부터의 부담'을 되도록 줄이려는 '밑으로부터'의 추세는 억압적 체제의 부패성 증가를 잘 반영하지만, 이 체제의 질적인 변화를 결코 의미하지는 않는다. 체제의 틈새에서 편하게 '놀기'를 갈망하는 심리가 그 체제의 수명을 연장시킬 뿐이다. 제도화한 폭력에 대한 완강한 개인적·집단적인 저항만이 억압체제의 진정한 종말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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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무군대가 초래하는 학습효과 저하 현상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 지배층이 그래도 징병제를 신성시하고 성역화하는 것은, 그들이 '노동력의 질'보다 '노동력의 충성심과 맹종'을 더 중시한다는 것을 매우 잘 보여준다.

 당사자인 한국인들에게 한국 군대에 대해 직접 들은 이야기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보수정치인이 다스리고 재벌이 소유하는 한국의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군대라는 것은 '보스'에게 맹종할 '충견'을 기르고 훈련시키는 일종의 '양견장'역할을 한다. 징병제의 존재 명분으로 보통 북한군의 남침 위협을 드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합리화 수단에 불과하다. 남침 위협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병의 사기나 전문 수준이 낮은 의무 군대보다는 기술 수준이 더 높은 모병제 군대가 위험을 방지하는데 더 적합할 것이다. 징병제를 일종의 성역으로 만들어놓고 모병제는 물론이거니와 서구 모든 국가에 있는 신앙에 따른 병역 거부권과 대체근무까지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당국은 북한의 위협보다 군대 복무의 '교육적 효과'를 의식하는 것이다. 내무반에서 병장에게 얻어맞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아첨을 떤 경험이 있는 사나이라면, 재벌 주인이나 국가 관료에게 '말대꾸'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한국 지배층의 상식인 듯하다.

 자유 박탈과, 양심이나 이념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절대적인 복종을 당연시하게끔 하급자를 훈련하는 군대에서는 구타 같은 형태의 폭력이 필수적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일정한 정도 완화는 가능하겠지만 보수정권과 징병제가 존재하는 한 엄금은 불가능할 것이다. 구타와 상습화한 아부, 매옹의 강요로 졸병의 인간성을 극도로 파괴하는 것이 징병제의 가장 큰 폐단이다. 이와 함께 약자에 대한 폭력 사용의 일상화, 상사에 대한 공포심리 발생 등 가정 생활이나 학습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치는 무수한 부정적인 효과들이 생긴다. 한마디로 폭력의 왕국인 군대가 개개인의 인간성과 국민 정체의 정신을 망가뜨리는 주범이라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