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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2011. 2. 17.
<눈오는 지도> 윤동주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로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나서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2011. 2. 17.
<목숨> 신동집 목숨은 때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 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 광년의 현암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하라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는 살아서 돌아오라. 2011. 2. 13.